"날마다 주님과" 연재 / 코람데오1 투고

                                코람데오(1)
                                        유해무
        코람데오(Coram Deo)는 고려신학대학원의 교훈이다. 이를 ‘하나님 앞에서’, 또는 神前意識이라고 번역하며, 대개 윤리적인 ‘정직’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코람데오가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을 잘 표현하는 용어이다. 루터의 고민은 ‘내가 의로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까?’였다. 마치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삼상 6:20)말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는 종교심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기 모습에 대한 고민이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루터는 감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로마 순례길에 베드로성당 앞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는 수고를 하여도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죄인이다. 이처럼 코람데오란,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 곧 죄임됨을 뜻한다. 이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의식하고 몸둘 바를 모르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를 말한다.
        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과격하게 대치하는 관계가 발생하였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자신 속에 갖힌 죄수가 된다.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고, 스스로의 종이 된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이런 이기적인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우상인 자기에게 바치는 수단으로 삼으며, 오직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인간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기주의자에게는 사귐과 교제가 있을리 만무하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런 죄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지으신 작품으로 볼 수가 없다. 만물 착취는 결국은 창조주를 착취함이다. 자신의 주인이 된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망자이다. 낙원에서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한 것이 아주 좋은 증거이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도피와 고립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항변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죄를 자백하지 않고 설명하려 드는 것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제 아무리 인간들 앞에서 선하고 의롭다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 아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지혜와 의에 만족할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로 그러하지 못하다. 자기 중심적이고 마음이 변명으로 가득 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심판날을 생각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심판하신다. 인간은 이것을 잊고 피하려할 뿐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 그는 죄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죄는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된다. 다윗을 보자. 그는 성왕이었다. 나라 바같으로는 외적들을 물리쳤고, 나라 안으로는 선정을 베풀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고, 예배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있기을 나눠주었는데, 여기서 아버지와 같은 목자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런 다윗이 유부녀를 탈취하고 그 남편을 전장에서 전사하도록 조종하였다. 제 10계명과 제 8계명과 제 7계명과 아울러서 제 6계명을 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였다. 자기의 범죄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서 비유를 전하게 하셨다. 양과 소를 심히 많이 소유하고 있던 부자가 가난한 이웃이 가지고 있던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만을 탈취, 도축하여서 손님을 대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를 듣고서 다윗은 분개하면서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6)고까지 말했으나, 그 마땅히 죽을 자가 자신인 것은 알지 못했다. 급기야 나단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직언을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백한다. 죄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폭로되고 계시되어야 알게 된다. 아니 아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고백해야 하는 신앙의 문제이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지식의 인식 차원이 아니라 신앙적 고백만이 사죄의 길로 인도한다.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다윗은 죄를 자백하면서 자신이 제 6계명이나 제 7계명을 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단이 다윗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삼하 12:9,10)고 지적하자, 그는 자신이 사람에게 범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고백을 한다. 나단의 방문을 받고 나서 지은 시편 51편에서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51:4)고 고백한다. 모든 범죄의 뿌리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제 1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 첫 계명을 겨냥하면서 다른 계명들을 강해한다. 각각 나란히 서있는 계명들은 첫 계명과 연관하여서 구체적으로 주석한다. 이웃에 대한 범죄도 범죄의 뿌리인 첫 계명의 어김으로부터 설명한다.
        그리고 죄는 계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죄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함일 수 있다. 그러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범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모독함이다. 이것이 루터가 깨달았듯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모습을 오직 계시를 통하여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죄가 무엇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려 하지도 않고 뵐 수도 없다. 오직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자백하게 된다.
        죄를 알고 자백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비로소 회복된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