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투고

 

                               고신교회가 존속할 이유가 있는가?

                                        -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고신교회는 2002년 교단출범 50주년을 맞아 기념 축제는 열었으나, 역사와 신학에 대한 학술대회는 갖지 않았다. 한국의 다른 기독교단의 기념행사와는 달랐다. 재건교회 총회는 “신사참배반대 70년, 재건교회 60년”이라는 주제로 2006년 12월에 학술대회를 가졌는데, 그 교회에 속한 어떤 신학자는 구약과 신약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나타난 언약 전통을 살피면서 재건교회의 신앙전통을 ‘언약신앙’이라고 규명한다.1) 한국기독교장로회도 교단 역사 4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장이 출애굽의 새 역사를 시작한 지 40년이 된 이 때에 기장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뼈대를 이룬 개혁신학의 전통을 되새김질”한다.2)

        고신교회는 교단 역사편찬 위윈회가 「한국장로교회사」를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0주년 기념 축제 중에 이를 감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출판 사실조차도 알리지 않았다.3) 고신교회의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신교회가 자기 역사와 신학을 반추하지 않는 것을 누락의 문제라고 단순하게 보고 넘어가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고신교회 안에 자기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70년대부터 교회 성장에서 뒤쳐진 고신교회 안에는 ‘또 순교 정신 우려먹나’식의 자조 분위기와 최근에 들어와서 불고 있는 ‘분리주의’ 논쟁이 이를 반영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는 것은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비록 수욕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 고신교회를 사랑하여 주신 것을 깨닫고 전진하기 위하여 역사의 반추는 필요하다. 먼저 역사를 개괄하고 신학을 정리하겠다.


        1. 고신교회 약사4)

        고신교회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약술하면 그 과정에서 고신교회의 신학적 논의와 그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약사에서 신학의 특징과 약점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주남선 목사(1888-1951), 한상동 목사(1901-1976) 등은 신사참배를 배교요 우상숭배로 파악하고 거부하다 검속 당한다.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먼저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는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신학교는 박윤선 목사(1905-1988)를 강사로 1946년 6월 23일-8월 20일까지 있었던 진해 신학강좌를 모체로 삼아 그해 9월 20일에 개교한다. 박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Bruce F. Hunt, 1903-1992)가 초대 교수였고, 1947년 10월에 공식적인 취임식이 있었다. 설립취지서에서는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autopistia, 헬)을 믿는 개혁신학의 원칙에 따라 칼빈주의 신학을 수립하여 한국교계의 사상을 통일하려는 뜻을 밝히고, 신학 운동이 참된 문화 운동이라면서 대학 설립의 염원을 표방하였다.5) 같은 해 7월 9일 진해에서 모인 경남노회 임시회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허한다. 노회(그리고 그 이후 총회)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는 1964년까지 사립으로 존속한다. 1947년 12월 경남노회가 인허를 취소하면서부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이들이 노회와 총회에서 견제와 소외를 당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는 1947년 10월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지만, 갱신 운동, 신학교의 총회 직영과 권징에 대한 이견으로 1948년 5월 사표를 내고 서울로 떠난다.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추구한 정통신학은, 1947년 6월에 2대 교장으로 취임한 박윤선 목사가 연구하고 가르친 개혁신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박 목사는 연구와 강의 외에도 신학교 기관지인 「파수군」에 많은 글을 쓰고, SFC 강령도 기초하여 개혁신학을 널리 보급하려고 애쓴다.6)

        1948년 5월 제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하니 노회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결의한다.7) 다음 해 9월 제35회 총회는 1948년에 결의한 바를 재확인하고, 경남노회는 한부선派와 관계하지 말 것을 결의한다.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는 급기야 1951년 5월 25일 총회로부터 축출당한다. 1952년 4월 제37회 총회가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완전히 단절 당한다. 같은 해 10월 16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이 발표된다. 송상석 목사(1897-1978)가 초안한 선언문은 고신운동은 신사참배운동의 죄를 회개하는 교회 정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임을 피력한다.8)

        1956년 9월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하고 첫 선교사를 파송한다. 총회 직전에 모인 부흥회에서 박윤선 목사는 “우리 진영에 교정하여야 할 몇 가지 과오”를 지적하였는데, 그 중 첫째가 예배당 확보를 위한 법정소송문제였다. 성도가 불신자를 걸어 소송할 수 있으나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반면, 마산 문창교회를 시무하는 송상석 목사는 소송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1957년 2월 박윤선 목사는 이 문제 외에도 신학교 운영의 질서 문제와 재정 문제 등으로 사표를 내고 고려신학교를 떠난다. 그러나 이사회와 교수회가 소송을 금한다는 교육 이념을 확인한 후에야 같은 해 9월 복귀한다.

        1958년부터 연속 3년간 고려신학교 직영 헌의가 총회에서 논의되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1960년 9월 박윤선 목사는 소송에 대한 이견으로 송상석 목사와 지상 논쟁을 하고, 신학교 운영에 대한 이견을 표명하다가 표면적으로는 주일 성수 문제로 고신교회를 영구히 떠난다. 한부선 선교사도 함께 떠난다. 고신교회는 같은 해 12월 13일 승동측과 합동하나, 1962년 10월 17일 한상동 목사는 일방적으로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한다. 1963년 6월 (합동)총회 고시부는 고려신학교 졸업생에게 강도사 응시 자격을 주지 않자, 8월 부산노회의 환원을 필두로 원래의 고신교회는 환원 총회로 재조직한다.

        1964년 칼빈학원(1955년 설립)은 고려신학교 대학부 과정으로 폐합되었고, 같은 해 9월 고려신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된다. 복음병원도 총회 직영이 된다. 총회는 1966년 9월 대학부의 대학 인가를 신청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사장이 일을 미루자, 이른바 ‘가(假)이사회’(또는 사조 이사회)를 조직하여 1967년 5월 인가를 얻는다. 이의 연장선에서 이사장 송상석 목사와 교수들이 갈등하면서 교수들이 전원 사퇴한다. 1969년 3월 이사회는 선별하여 대학부 교수 5명만의 사표를 수리한다. 같은 해 9월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고신교회의 신조로 채택한다.

        1972년 12월 29일, 송상석 목사는 법적 이사장 신분을 주장하면서 사퇴를 거부한다. 결국 총회가 선임한 이사장은 송 목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세속 법정에 고소한다. 1973년 총회는 성도간의 법정제소는 하지 않는 것이 본 교단의 입장이라고 결의하였다가, 1974년 총회에서는 남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수정한다. 같은 해 12월 총회 재판부는 송 목사를 면직한다. 결과적으로 반고소를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하여 교단 분열이 일어난다. 1992년 제32회 총회시에 이전 경남노회에 속한 이들을 다시 영입한다.

        1980년 고신대학으로 교명이 바뀌고, 고려신학교는 특수 대학원인 신학대학원으로 개편된다. 1988년 4월부터 고신대학, 특히 의과대학 학생들의 소요 사태가 계속 일어난다. 1998년 신대원이 천안으로 이전한 이후, 총회 장소로 사용되면서 2000년부터는 고신의료원 노동조합원의 시위로 총회가 지연되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다.

        이것은 교육부가 학교법인 고려학원을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고, 두 차례나 감사를 받다가 급기야는 2003년 4월 1일에 총회가 선임한 이사의 등록을 취소하고 교육부가 임시이사(종종 관선이사로도 불림)를 파견하였다. 그 이후 고신교회는 의료원 사태로 몸살을 앓았고, 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의 내분은 복음 사역과 하나님의 영광에 큰 장애가 되었다. 2007년 4월 임시이사가 철수하였지만, 현재도 이사 전원을 총회가 선임하지는 못하고 있다.


        2. 고신교회의 신학

        2-1. 약사에서 나타난 고신교회의 삶의 특징과 신학

        고신교회의 역사 초기에는 일제 신사참배 강요를 대항하여 생명까지 내어놓은 신앙의 선배인 출옥 성도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참배를 국민의식이 아니라 제1계명을 어기는 큰 죄로 보는 영적 통찰력을 지녔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재건을 위하여 먼저 신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신학 훈련을 특별하게 받지 않았으며, 이른바 정치력도 없었지만 신학적 자유주의를 대항하여 보수주의 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성경을 신앙과 본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며,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의 교리대로 고려신학교에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며, 한국장로교회가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였다.9)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에 머물렀지 개혁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거나 개혁신학을 이해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었다.

        결국 초기 고신교회의 신학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목사의 몫이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를 곧장 떠난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 작업을 할 기회를 포기한 반면,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초기 10년 동안 일구었다. 박윤선 목사는 메첸(J.G. Machen; 1881-1937)을 존경하고 반틸(C. Van Til)을 추종했으며 화란신학을 사모하였다. 역사적 개혁신학이 가진 대부분의 면모, 곧 신조에 기초한 장로교 정체성 확립,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계관이나 인생관 등을 소개하였다.

        고신교회에서 인재가 떠나는 일에는 거의 다 신학교와 신학교를 중심한 법정 송사가 개입되어 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 때문에 왔다가 신학교 때문에 떠났다. 첫 위기는 교회당 쟁탈 소송문제이다. 경기노회의 행정 보류나 박윤선 목사가 일차로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은 송사와 관련되어 있다. 위기를 극복하려고 1960년 12월 승동측과 합동하였으나, 더 큰 상처만을 안고 환원한다. 환원 이후 신학교를 중심으로 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다가 급기야는 세속 법정에서 송사라는 큰 오류를 범했다. 가(假)이사회 사건이나 1976년의 교단 분열에는 이사장과 송사 문제가 그 중심에 서있다. 이후에도 학교법인을 중심으로 한 송사문제가 고신교회를 계속 흔들 것이다.

        이런 혼란의 중심에 대학교가 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나 한명동 목사가 문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이 관심이 고신대학교로 나아가는 시발점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고신대 학생의 미문화원 방화나 데모 등, 복음병원을 중심으로 한 갈등은 계속된다. 2003년 관선 이사가 오고도 내부의 갈등을 지속되었다. 비록 정이사 체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이사 중에 비고신교회 인사도 있다. 고신교회의 정체성은 계속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고신교회 역사 60년 동안 시끄러웠던 문제들은 신학적, 교리적 문제나 전도와 선교의 문제도 아니었다. 1963년 환원을 기점을 삼아 그 이전에는 송사 문제가 관건이었는데, 이것은 신사참배 반대 정신으로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고신교회의 정체성과는 합치될 수 없다. 환원 이후 교회가 직영하는 대학과 병원을 둘러싼 문제들은 목사, 장로들이 대학과 수익기관인 병원을 운영하는 이사직을 사모하여 교회직분의 속화를 야기하였다.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10)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에서 고신교회가 개혁하려고 했던 점들이 이제는 고신교회 안에서도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송사문제나 대학의 확장이나 운영 문제에서 신학적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사실은 아예 없다. 일을 진행시키지만 정치적, 행정적인 결정으로만 이루어질 뿐, 신사참배 거부 정신을 따라 사안의 정당성과 순결성을 미리 논의하고 개혁신학의 원리를 따라 일의 진행을 점검하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전통을 정착시키지 못했다. 망루를 짓거나 전쟁을 하기 전에 자신의 형편과 능력을 점검하는 지혜를 고신교회는 갖지 못했다. 신학적, 교리적으로 영글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는 본고에서 고신교회의 역사로부터 고신교회의 신학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고려신학교와 초기 고신교회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신학적 입장은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인데, 이것은 박윤선 목사의 신학이기도 하다. 이와는 구별되게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이 지닌 신학은 현장의 신학이었고, 그것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학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경중심적 보수주의’이다. 이 두 입장이 고신교회의 신학과 정체성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고신교회 안에서 이 두 입장을 계승하면서 발전시킨 신학적 입장이 있으니, 그것을 ‘문화적 개혁신학’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근삼 교수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 세 입장을 차례로 살펴보겠다.11)


        2-2. 박윤선 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쓴 ‘대한예수교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1949) 그리고 송상석 목사가 초안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1952) 등 초기 문헌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신학을 표방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한다. 그런데 ‘설립 취지서’는 박윤선 목사가 초안하거나 그의 영향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12) “1946년 고려신학교 개교 이래 약 15년 동안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설립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의 순교적 신앙의 틀 안에서 박윤선 목사가 미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배합 주조해 낸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윤선 목사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13)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신학은 박윤선 목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던 설립자나 송상석 목사 등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을 운위한 것은 전적으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평양신학교를 수학하였다.14) 이들이 수학할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어떠했는가? 그 신학교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가르쳤지만, 근본주의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으며, ... 물론 교수진이 성경의 권위를 칼빈주의적으로 믿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했다.”15) 박윤선 목사의 신학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과 독서와 유학으로 습득한 화란신학이 근간을 이룬다.

        박윤선 목사는 두 차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1934-6; 1938-39)과 한 차례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1953,10-54,3)의 기회를 가졌다. 평양신학교 시절까지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으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하면서부터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하였고, 한국에서 가르칠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돌아왔다고 회고한다.

        박윤선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관과 신조 그리고 문화관에서 나타난다. 먼저 성경관을 살펴보자. 조선신학교가 “우선 성경관에 있어서,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개혁교회의 특징으로 성경 교육, 즉 일반 교우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16) 그에게서 칼빈주의는 한 마디로 성경주의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ale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17) 이것은 성경의 자증적인 신임성(autopistia)을 말한다. 이에 기초하여 “성경이면 그만이다”는 신앙 논리에 안착한다. 이런 성경관은 그가 평생 몰두한 성경 주석 작업의 저변에 깔려있다. 박 목사는 성경 말씀을 기도로 깨닫는 노력도 중시하였다. “경중으로 말하면 성경 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기도도 없어서는 안 된다.”18)

        박 목사의 화란 유학 기간은 짧았지만, 일차 미국 유학 때부터 화란어를 틈틈이 자습하여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에 속하는 카이퍼와 바빙크 뿐만 아니라 신약 주석가인 흐로쉐이드와 흐레이다너스, 그리고 교의학자 스킬더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바빙크의 개혁교리학을 애독함으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19)

        초대 교장으로 내정된 박 형룡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 목사는 교장 서리와 교수로서 주경신학은 물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그리고 성경 원어까지 맡아 가르쳤다. 개교 2년 후에 이 상근 목사가 조직신학 교수로, 김진홍 목사가 구약과 히브리어 담당 교수로 취임한다. 그래도 강의와 저작을 통하여 신학 전반에서 박윤선 목사의 영향이 가장 컸다.

        박윤선 목사는 강의, 설교와 저작 활동 특히 성경 주석 작업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가운데서도 주석 작업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다.20) 박 목사는 주석으로 목사들의 설교를 돕고 싶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칼빈주의의 원칙을 따라 주석하였다. 이 원칙을 따라 칼빈과 칼빈주의 계열에 선 저자들을 많이 인용한다. 특히 신약 주석에서는 화란 주석가들을 많이 인용한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성경적인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신조를 강조하여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전통과 화란 전통을 소개함으로 평양신학교나 한국장로교회 일반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개혁파’라는 용어를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문화관이다.

        먼저 신조와 장로교의 정체성 확립을 살펴보자. “경건과 신학이 겸전한” 박 목사는 고신교회의 신학을 주조하였다. 이것은 안정을 유지하지 못한 해방 후 한국교회의 상황, 기반을 제대로 잡지 못한 신학교, 과중한 업무와 고신교회 내의 교회정치의 부조리 가운데서도 박 목사가 홀로 이룬 업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박 목사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인 신학 작업을 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직접 인용하고 가르침으로 고신교회가 장로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 목사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웨스트민스터고백서 1장(성경), 3장(하나님의 작정), 4장(창조), 6장(죄), 8장(중보자 그리스도), 11장(칭의), 14장(구원받는 믿음) 등으로 대별시켜 비판한다.21) 또 성경관을 진술하고 변호하며, 치리회의 오류 가능성을 제기 위하여 개혁파 신조 및 여타 복음주의 신조들의 입장을 소개한다.22) 이로 보건대 초기 고려신학교가 신조를 가르쳤고 총노회 발회 선언문이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교리로 파수하는 운동임을 선포한 것은 기릴만한 일이다. “(한국 장로교) 4대 교단 중에서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지지하고 연구하고 가르친 곳은 고신교회이다.”23)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박 목사의 기여이다. 박 목사의 기여로 고신교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 목사가 이런 정체성 확립 위에 초기 고신교회를 평가하고 경고한 것도 그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고백적 관점에서 나왔다. 경남노회가 장로교 신조를 받아들이고 일제 말기의 오점들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하고 신학적 타협주의를 배척하고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고 하지만, 이 노회 지지자들이라 하여 다 성자라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절대 복종을 기약하며 전 세계의 큰 무리의 위협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 인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혈기와 만용으로 발악하는 일이 없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도 경고한다. 박 목사는 이런 입장을 파수군 또는 항의자의 노선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이 입장이 너무 영광스러움을 느끼면서 황송하게 생각한다. 소경이 문고리를 잡게 된 격이다”고 감격해 한다.24)

        박 목사는 신조에 기초한 신앙고백적 입장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초기 고신교회 안에 소개하였다. 그는 이런 고백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사조들을 비판하고 경계했다.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 신학이나 신비주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까지 비판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적 노력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로서, 감리교나 성결교회에 많고 장로교 안에서 이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장로교의 교역자들로서도 무의식적으로 알미니안 신학 사상을 가진 실례가 많으니 통탄할만하다.” 특이한 것은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 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25) 바로 이점에서 박 목사가 견지하는 개혁신학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박 목사가 신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교회에 뿌리내리도록 애썼다. 고려신학교는 이미 출범부터 이 신조들을 채택하였으니, 이 신조들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의 내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6) 그리하여 고신교회 안에서는 특히 중고등부와 대학부에서 소요리문답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고백서까지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고신교회는 69년 9월에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공식적인 신조로 채택하였다. 박 목사의 주석과 이런 공부로 고신교회의 설교는 내용과 뼈대가 있으며, 고신교회 신자들은 믿음이 곧고 삶은 반듯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고신교회는 아주 건실하게 성숙하고 있었다.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그가 추구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한국교회 토양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 성경 비평이 들어올 때,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성경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조와 이에 기초한 신학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종국에는 청교도적 열심을 가진 복음주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장로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 전체에 해당되고 고신교회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로, 박윤선 목사의 사역으로 고신교회는 한국교회에서 ‘개혁신학, 개혁파, 개혁교회’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주의와 다른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가 화란신학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28에 기초하여 과학을 말하며, 비록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지만 속화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나라에 대한 책임도 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도 사람을 위함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줄 안다.”27) 이 말은 이원론을 기초로 하는 복음주의를 넘어서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기조요, 선구자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에 남겨준 유산이다. 고신교회는 장로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문화 이해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에서 독특한 유산을 전수받았다.

        그렇지만 박 목사의 사역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그의 강의와 주석 집필로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석에는 구속사적 언약신학과는 대치되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자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주석하면서 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죄인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른바 이런 식의 영해(靈解)는 주석 전반부에 골고루 나타난다. 또 그가 주석에 첨가한 설교나 설교 개략에서도 이런 영해가 종종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즉 그의 영해는 제동 장치를 가진 셈이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예화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28) 그가 강해설교를 소개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설교 방식, 즉 청교도적 열심은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부족했던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을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선배이신 박윤선 목사가 지닌 한계를 본다. 그의 주석에는 “깊이가 결여”되었다.29) 우리는 선구자인 그분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여 저술한 주석 구석구석까지 기독론적 해석과 개혁신학의 기조가 깊이 스며들지 못했음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박 목사가 개혁파의 중요한 특징인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의 방편에 진정한 관심을 보였다면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진정한 칼빈적 개혁파가 되었을 것이다. 가령 화란 개혁교회가 이 관점에서 확립한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는 언급한 적이 없다. 기독교 학교는 유아세례 시에 행한 부모의 약속, 즉 구원의 도리인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집에서 가르치며 또 가르치게 하겠다는 약속에 기초하여 세웠다.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징으로서 개혁파는 언약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은혜언약의 표와 인인 세례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세계관과 문화 그리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염원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즉 박윤선 목사가 책을 통하여 배운 화란 개혁신학은 그 내용상 제한적인 면이 있다. 이후 개혁신학은 고신교회에서 이 중요한 특성이 빠진 채 문화적 개혁신학으로 소개되고 정착한다.

        하나 더 부언할 바가 있다. 초기 고려신학교가 장로교 총회에 대해서 가진 태도이다. 고려신학교는 초기부터 독립신학교를 지향하였다.30) 이것은 박형룡 박사가 부산을 떠나는 주요한 이유였다. 교권이나 교회 정치가 신학의 자유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 독립신학교의 기조이다. 그런데 독립신학교에 대한 생각은 박윤선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독립신학교를 표방한 신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면서 그 학교의 강한 지도자인 메첸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신학교 시절에 그가 독립신학교를 지향하는 발언을 하였다거나 이 이론의 정신적인 지주로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이후 그가 합동신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 정신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신학교는 교단의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인준’신학교로 남아있다.31)


        2-3.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

        박윤선 목사를 만나기 전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운위하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비록 이들이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공언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학교와 목회 현장의 괴리를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신학이 있으며, 있다면 어떤 신학인가? “한상동은 기도 중에 다음 계획을 세웠다. 신학교를 세워 보수신학의 요람을 만드는 일이었다. 생활의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경중심의 교역자 양성을 하여 점차적으로 한국교회를 정화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32) 이들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경 중심과 기도의 신학이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신사참배, 동방요배, 국기배례 등 모든 죄악을 우상숭배로 파악하였다. 즉 신사참배는 영적 간음이며,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다.33) “신사참배는 일본 국신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와 종교 의식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 신자로서는 양심적으로 생각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나, 절대로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신사참배는 절대로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34) 그리고 이들은 항상 기도하였고, 기도로 말씀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기도하는 학교로 만들었다.35)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을 개혁신학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36) 차라리 정통신학, 또는 보수주의, 또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아니면 박윤선 목사의 표현처럼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 10년을 회고하면서 고려신학교는 혼란한 신학 사조 가운데서 진리를 밝혀주는 보수신학과 회개운동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혼란한 신학 사조로는 신신학, 신정통, 신비사상 등을 들지만,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37)

        이로 보건대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신학적 훈련을 크게 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저 평양신학교의 청교도적인 경건을 배워 성실하게 사역한 목회자들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 교수들에 대해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그들도 역시 평양신학교에서 받은 그대로 성경 무오성을 믿으며 경건하고 정직하게 목회하는 보수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신학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다. 가령 이들의 글이나 설교에서 신신학이나 신정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경계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웨스터민스터 신조에 대한 이들의 입장도 그러하다. 비록 고려신학교 교육 지표에는 신조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게 나오지만, 이들이 신조를 연구했거나 설교나 강의로 교인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 그것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크게 존재한다.

        그들이 신조에 대해서 미온적이었고, 신학적 훈련을 계속하거나 자력으로 연구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의 신학을 굳이 지목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선교사로부터 전해 받은 단순한 경건 생활과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 소박한 목회에서 나오는 현장의 신학이라 하겠다. 많이 배우거나 연구하지 않았지만, 성경 말씀에 기본적으로 충실하였고 그 말씀을 따라 설교하고 가르쳤으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당대의 다른 목회자들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파악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감내하면서도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결단을 내리는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특별하신 은혜라고 할 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가 회개운동의 중심이라고 자주 말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를 정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고 신학교를 세웠다. 이들이 공적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데 실패한 한국사회의 일부로서 회개하지 않았다. 당시 교권을 잡은 이들은 대부분이 친일 행적을 지닌 자들이었고, 이들이 스스로 회개하지 않을 때,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이 회개와 권징에 대한 이견 역시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는 이유였다. 그가 떠나자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신학교 지지 세력은 분리주의적인 폐쇄 집단으로 비쳐지기 시작한다. 박 박사는 참 교회 건설에 선행해야 하는 공적 회개와 권징을 간과하고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 설립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옥중 성도들이 “새 교단을 형성하고자 교회 밖에서 싸우고 있다”고 발언하여 이들이 교회분열주의자로 눈총을 받는 데에 일조하였다.38)

        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삼지 않으려는 한상동 목사의 태도는 오해를 사고도 남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편과 여기에서 나타난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에서 교훈을 얻어 신학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회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교회 자체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 총회 직영은 피하거나 유보하면서도 경남노회의 인허는 취득했다. 즉 적대적인 총회와 호의적인 노회를 구별한 것이다. 이것은 교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다.39) 더구나 이른바 ‘신성파’도 아니었다. 이들은 야심 없이 소박하였고, 그냥 제한적인 방법만을 강구하였다. 친일하다가 친미로 전향한 당시의 여러 교계 지도자들이 지녔던 타협적인 처세술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40)

        이들이 당시의 평균적인 목사보다 조금이라도 더 신학적 소양을 가졌고, 세태를 파악하고 전체 장로교회를 장악하려는 욕심을 가졌더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신학교 측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호의적인 경기노회를 기반으로 삼아 총회 직영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인정 철회에 반발하여 총회를 떠났다. 이들이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은 것은 일제의 통치를 자기들 방식으로 평가한 정치적 처신이다. 이들은 분명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성경 비판학’을 소개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수는 신학의 제학설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게” 한다는 교육이념을 표방하였다. 조선신학교(1940년 개교) 설립의 견인차였던 김재준은 “당시 한국교회의 전투적인 교권주의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에게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그의 신학적 실존을 토로하기를, ‘저가 칼빈신학을 애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장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41) 이들은 정세 변화에 따르는 처세술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학적 대세를 판단하고서 스스로 칼빈을 읽고 칼빈신학 애호자로 자청할 수 있는 신학적 훈련도 쌓았다.

        이런 정치력과 자발적인 교회 분리 자세를 출옥 성도들은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처세술이라는 것은 없고 신학적 훈련도 부족했고 신조에 대한 태도도 불분명했던 옥중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의 원칙은 결과적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들과 유사한 핍박을 받았으나 전후의 독일교회를 화합의 장으로 이끌었던 독일교회의 옥중 성도들이 보인 신학적, 정치적 성숙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이 교만해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사고와 표현의 미숙에서 교회재건의 원칙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42)

        출옥성도들이 신학적 소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 5도 연합노회는 1946년 1월 20일 5개 조항을 발표한다. 즉 주일 성수,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예배당의 예배 이외의 사용 거부, 정치에 종사하는 현직 교역자의 사면, 교회가 지닌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천명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순교를 당한다. 이에 비하여 고려신학교와 연관된 출옥성도들은 군사 정권 치하에서 협력하거나 침묵을 지켰고 맘몬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서 충분히 경계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가 제한된 신앙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 투쟁을 신학화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특히 한상동 목사는 지도자로서 아쉬운 점도 더러 남겼다. 박형룡 박사와의 결별이 그렇게 원리적 선택이었고 모든 오해와 피해를 담담하게 감수할 정도로 정당하였다면, 합동에 적극적으로 응한 그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개인적으로 결정하고 그것도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선언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박형룡 박사와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박윤선 목사가 떠밀리어 떠날 때에도 한상동 목사는 침묵하였다. 박윤선 목사가 고신교회 10년 회고에서 이사와 교수로 동시에 사역하고 있는 문제도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양 신분을 유지한 한상동 목사를 향한 공개 질의의 성격을 지녔다. 고신교회가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는 평가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될 법하다. 이후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신학교를 개편하여 대학 설립을 추진할 수야 있겠지만, 송 목사를 설득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가(假)이사회의 이사장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일을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송 목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신교회가 고소파라는 비난을 받는 서막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을 가지고 소급하여 그는 애초부터 ‘분리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43) 한상동 목사가 편의적인 처세술과 신학적 소양을 갖춘 지도자였다면 어느 정도는 헤쳐 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지도자는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하지만 때로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 지혜와 신학적 안목으로 난국을 미리 피하거나 인내하고 사람을 격려하고 아끼면서 회개운동을 지속했어야만 하였다. 한상동 목사에게는 이런 부족한 면도 있었다.44)

        이후에 고신교회는 소송이나 문서 위조, 내적 비난과 분열의 악순환을 겪는다. 회개와 권징을 주장하던 고신교회와 고려신학교는 오히려 회개와 권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학교법인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태를 보자면, 고신교회의 원래 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속 법정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교육부의 유권해석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정교의 분리의 진정한 정신을 알지 못하는 신학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가(假)이사회 사건은 ‘일은 먼저, 수습은 뒤에’라는 비개혁주의적, 비공동체적 선례가 생긴다.45) 신조에 기초하여 잘 훈련된 신학 전통이 수립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나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에 기초하여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쉽게 요동질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학의 빈곤은 주로 고신대학교, 고신의료원과 신학대학원 등에 연관된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서 역력하게 나타난다. 총회나 노회 등 치리회의 운영에서도 같은 양상은 수없이 나타난다. 신학적 토론의 전통이 아예 정착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을 외치고 출범한 고신교회는 이제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오랫동안 목회학과 설교학을 가르쳤다. 그의 영성을 고신교회 목사들이 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가 고신교회 목회의 면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후배들이 이 시대에 강요되는 신사참배에 해당하는 우상숭배를 영적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믿음의 용기로 싸우며 순결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고신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일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2-4. 이근삼 교수의 보통은혜에 기초한 문화신학

        이근삼 교수는 개혁신학의 틀을 박윤선 목사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리고 박 목사보다 개혁주의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였다. 고신신학의 정체성을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학, 곧 칼빈이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에게 가르쳐준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은 박윤선 목사에게서 계시의존 사색, 하나님의 말씀 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철두철미하게 훈련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가 혼자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치다 보니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목적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현대신학을 공부하고 “박윤선 목사가 그렇게 좋아하던 화란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46)

        이 교수는 1962년부터 32년간 고려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기도와 순결한 생활을 강조했다.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많은 후배와 제자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인재 양성과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하여 기독교대학에 누구보다도 집중적으로 몰두하였다.

        이 교수는 신학자로서 많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 신도를 비판하고 신사참배 거부 정신의 신앙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일본 고베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도주의의 실상을 강의하고 경고하였다.47)

        무엇보다도 칼빈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하였다. 칼빈의 생애를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교육자의 입장에서 살폈고, 교회론과 성찬론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칼빈주의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겼다. 칼빈주의의 종교관, 인간관, 학문론, 생활관, 직업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연구하였고,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문화는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친 분야이다.48)

        이 교수는 신조를 개혁신학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가르쳤다. 먼저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서」를 번역하였고 고신교회는 이것을 다른 신조와 함께 1970년 20회 총회에서 채택한다.49) 이 교수는 고백서에 고백된 신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글도 썼고, 「소교리문답서」를 해설했다.50) 나아가 교단 교육위원회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서 교리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이 칼빈을 통하여 이해된 성경 교리 사상 체계는 교회들이 채택한 공적 신앙고백들과 그를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의 고전적인 저서들을 통해서 발달되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를 종종 검토한다. 어거스틴과 칼빈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혁신학자들을 나열하면서 동시에 신조의 입장에서 개혁파의 계보를 살핀다.51) 개혁주의의 특성으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공교회 중심의 신학이라고 요약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예정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별도 덧붙인다.52) 물론 칼빈주의 오대교리도 언급한다. 또는 특이한 정치제도로서 권징, 순수한 교리와 순결한 생활 강조,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덧붙이기도 한다.53)

        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개혁주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통하여 교리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다. 이 문맥에서  기독교대학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종사하는 개혁주의 전통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임을 말한다.54) 박윤선 목사가 가히 그냥 지나가듯 거론한 바가 이론적으로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실제로도 구현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기독교대학으로서 고신대학교는 이근삼 교수와 그의 사역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1946)에는 ‘보통은혜 원리’라는 말이 나온다. 문화운동을 말하다가 갑자기 대학제도를 거론하면서 “역사가 오랜 켐브리지, 옥스퍼드 대학등이 皆是(개시=모두 다) 교회대학으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말하자면 기독교대학을 포함하는 문화운동도 천국을 구하는 정통신학운동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아주 진취적인 입장이다.

        ‘보통은혜 원리’라는 표현은 화란신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취지서의 필자가 화란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이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를 박윤선 목사가 작성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이다. 화란 유학 이전부터 화란신학자들의 신학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발표한 교회론에 관한 논문에서 “장로교는 개혁신학을 주장하나니 개혁신학의 최중요사상은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autopistia)을 믿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점은 개혁신학을 성경관의 관점에서 정립하려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개혁신학의 성경관의 입장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교회론을 다룬다.55) 특이한 것은 그가 바빙크의 교회론을 소개하면서 바빙크가 교회론을 보통은혜의 관점에서 먼저 다루고 나서 마지막으로 특별은혜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그대로 소개한 점이다.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 보통은혜의 영역에서부터 그 원리를 찾는다.” 박윤선 목사가 칼빈주의를 굳이 개혁파라 부른 배경에는 화란 개혁신학이 있으며, 그 중 보통은혜원리에 관한 관심도 포함된다. 바빙크에 대한 글이 이보다 이전에는 출판된 적이 없긴 하지만, “헬만빠빙은 교회론에 있어서도 역시”라는 말은 박윤선이 바빙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1952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칼빈주의에 관한 일련의 논문에서 화란신학과 보통은혜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56)

        고려신학교는 1955년에 종합대학교를 목표로 하고 예과 과정을 4년제 대학과정으로 개편하고 칼빈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보통은혜에 기초한 칼빈주의 문화관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고, 이 영향은 박윤선 목사를 통하여 들어온 화란개혁신학의 문화관이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를 이미 영구히 떠났고, 고신교회는 환원한 후 고려신학교를 직영하면서 곧장 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설립을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등장하고, 양편의 알력과 견제 가운데서 사조 이사회사건이나 성도간의 법정 소송 등 교회 정치의 갈등, 교회 분열과 교회의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계속 당한다.

        대학 설립 찬성 인사 중에 이근삼 교수가 있다.57) 칼빈주의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기독교대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우리 귀에 익은 ‘일반은총’이라는 표현은 주로 그가 전파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화란 개혁신학자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일단 전제로 받아들인다. “문화는 일반은총을 통하여 자연에 주어진 원시적인 힘이 결실하기 때문에 일반은총의 산물이라고 한다.”58) 그러나 “신자들의 문화활동은 단순히 일반은총의 역사로만 해석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바빙크와 칼빈을 따른다.59) 화란 신학은 문화와 세상에 무관심한 신자들을 일반은총론으로 설득하고 활성화시켜 개혁파 고유의 문화관을 수립하고 실제적으로 문화적인 삶을 살았다.

        이 교수는 일반은총에 기초한 문화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이것은 기독교대학에 집중된다. 기독교대학의 신학적 기초는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대한 문화적 명령에 따라 발전하고 가꾸고 활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다. 이 사명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타락 이전에 맺어진 일반은총에 속한다.”60) 이 사명을 개혁주의 세계관, 칼빈주의 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신학이 아니고, 정치, 사회,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전체 포괄적인 사상 체계이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며, 세계를 보며 판단하는 사상체계이다.

        이런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곳이 기독교대학이며, 기독교대학은 이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돕는다. “이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나가는 학생들이 장차 목사나 선교사, 의사가 되고 의료선교사, 간호사가 되어서 세계 각지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사명을 받아 나가게 될 것이다. 또한 교육자, 음악가, 과학자들이 되어서 국내외 사회의 요원으로 자기가 봉사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일하는 일꾼이 될 것이다.”61)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애지중지했던 대학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난 반년이 넘게 계속되는 사태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언론기관을 통해서 사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주목과 염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전에 우리가 잘 믿는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던 고신파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이제는 ‘고신파’라고 자칭하거나 부름 받기가 부끄러워졌다고 한탄한다.”62)

        해결책으로 대학과 신대원의 분리를 주장한다. “현재 고신대학은 총회직영이라는 이름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총회직영을 신학대학원(목사 양성기관)에 한정시켜서 명실 공히 총회직영 기관답게 전국 교회들이 그 경영을 책임지며, 신학사상도 철저히 감독하여 일심으로 협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은 대학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출자이사들을 모아 대학 경영의 새로운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 이제 현시점을 잘 파악하여 총회적으로 결단을 내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63)

        이근삼 교수는 한국 사역 말기에 고신교회의 상징인 대학교의 장래에 대하여 특단의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 대안은 그 이후 고신교회가 연례적으로 겪게 될 내부 갈등과 임시이사의 파송을 예상이나 하는 듯하다. 이 대안은 엄청난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에 얻은 지혜이고, 궁극적으로는 고신교회가 따라야 할 고견이다.

        그렇지만 이 지혜로운 대안에도 재고해야 할 문제가 있다. 후천적인 결론으로 등장한 이 대안은 그의 초기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개혁주의 기독교문화관을 정립한 것은 고신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 높이 평가할 이론적, 실천적 업적이다. 그러나 이 문화관의 연장과 총체로서 기독교대학을 말한 것이 이근삼 교수의 특징이요 동시에 한계이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기독교대학의 중요한 기초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기독교학교로서 기독교대학의 출발점은 유아세례이다. 부모가 세례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의 사명은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교교육까지도 포함한다. 자유대학교를 세운 카이퍼를 화란의 수상으로 만든 배경은 멀리 소급하면 기독교학교운동이다. 이 부모의 교육적 사명과 책임을 기독교학교로 실천하면서, 기독교문화도 개혁파 신학과 신자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학교의 설립과 운영 주체는 부모이다. 굳이 따지자면 ‘출자이사’가 이에 해당한다 하겠지만, 이것은 재정과 운영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지, 부모의 입장을 고려한 대안은 아니다. 고신교회가 개혁파로 자부하였지만, 고신교회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신대학교를 볼 때, 고신교회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랬다면 기독교교육학과는 졸업생을 위하여 교회 안에 ‘교육사’ 제도를 소개하기 전에, 기독교 초등, 중등학교를 먼저 세워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전후가 엇갈린 상황에서 ‘출자이사’ 제안은 뜬금없는 제안으로 들릴 것이요,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64)

        또 다른 측면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고신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중요 주제였다. 바로 신사참배 강요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학위논문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렇지만 고신대학교의 역사는 그의 논문에서 별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아 교수는 대학 인가의 필요성을 논할 때에 여권 발급이나 입영 연기 등을 든다. 이런 논거까지도 고신총회에서 수용되어 가(假)이사회나 세속 송사까지 불사하면서 대학은 설립되었고, 의료원을 가진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카이퍼가 대중화시킨 ‘영역주권론’은 자유대학교의 ‘자유’의 의미에 잘 들어있다. 즉 신앙고백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영역 주권의 주요 핵심이요 적용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비기독교적이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성경을 비판하고 신조를 떠나 신앙적,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한 교회의 교권으로부터도 ‘자유’하기를 원했다. 이 후자의 자유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추구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국가 권력인 교육부의 정당한 개입뿐만 아니라 부당한 개입까지 자초하였다. 영역 주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육부는 교회의 기관인 학교에게 지시할 수 없다. 이 말을 교회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거나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해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교회는 국가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필요하게 국가의 간섭을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부모인 교인이 아니라)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병원을 수익기관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하고 불필요하게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사조 이사회 사건 이후 최근,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의 위치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육부를 상대로 교회 구성원 내부의 갈등을 판단하도록 요청한다. 교육부의 권세를 전제로 하여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정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세속 법정에서 가부를 결정하려는 송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는 개혁주의는 극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기독교대학의 본질의 문제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에서 이근삼 교수는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 신학자가 다 걸머질 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맡아야 할 짐의 분량은 상대적으로 누구보다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근삼 교수는 신학자, 대중 강연자, 대학 경영자로서 남다른 열정과 성과를 거두었다. 박윤선 목사가 추구했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확립하고 널리 보급한 후계자이다. 박윤선 목사를 선생으로 만나 ‘세밀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열정을 배우고, 미국과 화란으로 가서 세밀한 부분까지 공부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그 역사와 신조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확립하였고, 이 신학이 지닌 힘,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고 계속 따라야 할 신학이다. 이미 받은 전통적인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65)


        2-5. 고신교회의 신학과 그 현재 모습

        고신교회의 정신의 저변에는 한상동 목사의 영성이 있다. 신사참배 거부 정신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계명대로 순종하려는 믿음에서 나왔다. 즉 참배를 우상숭배로 파악했다. 성경에서 출발한 보수주의자였고, 겸손하고 인내하며 기도로 평생 목회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한 목사는 자기의 삶과 투쟁을 신학화할 수 있는 훈련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목회학을 평생 가르쳤지만, 그것은 자기의 설교와 목회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장에서 체험한 것을 예화처럼 들려주는 그런 방식이었다. 그가 성경 말씀에 대해서 가진 태도를 개혁주의라고 칭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을 고려신학교와 초기 고신교회가 공언한 개혁신학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하다. 즉 그가 고려신학교를 세운 목적에는 회개와 갱신, 그리고 개혁신학의 전수와 순교적 생활의 계승이 있겠지만, 그의 삶을 특히 초기부터 개혁신학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고신교회 안에서 초기 고려신학교를 개혁신학의 요람으로 보려는 시도가 많지만, 그것은 한상동 목사와는 직결되어 있지 않다.66)

        경건하고 목숨까지 버리려는 믿음의 용장이었으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고 처세술이 미흡하고 장로교총회와 무관한 신학교를 하려다 결국은 ‘분리주의’의 비난까지 받았으나, 한상동 목사나 초기 고려신학교와 그 지지 세력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것뿐이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상동 목사의 이후 삶에는 이런 분리주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들도 일어났다. 이 일들은 고신교회 이후 역사에서 소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박윤선 목사의 작품이다. 세 차례 유학을 통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과 화란신학을 습득하였다. 칼빈주의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발견했다고 기뻐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개혁신학이라는 말이 50년대부터 크게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박윤선 목사의 공헌이다. 칼빈주의를 성경주의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성경 비평이나 신정통주의에 대항하는 그의 선택이었다.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마친 성경 전권 주석은 이런 선택과 확신과 열정에서 나왔다. 주석과 설교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서 그를 떠나서 한국교회사를 말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가히 매주일 그의 주석과 설교가 전국 교회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특히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는 더욱 그러하였다. 나아가 신조를 고신교회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고신교회 목회자의 설교는 뼈대가 있고, 고신교회 교인은 신뢰할 만하다는 평이 울려 퍼지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가 추구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한국장로교회, 그 중에서도 고신교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주석은 개혁파 전통과 알레고리(풍유적 해석)를 적당하게 담고 있다. 개혁파 특유의 구속사적 주석과 설교를 구사하지 못했다. 또 신조에 대한 강조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가 평양신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했다.”고 말하였듯이, 이런 상황이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에도 재현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이다.

        박윤선 목사의 입장을 가장 잘 계승한 인물이 이근삼 교수이다. 고신교회의 정체성 확립에도 앞장섰고, 칼빈과 칼빈주의의 전통을 역사적으로도 살피면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박윤선 목사가 살짝 거론한 일반은혜론과 이에 기초한 기독교 문화관을 확립하였고, 구체적인 표본으로 기독교대학인 고신대학교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이런 면에서 박윤선 목사보다 진일보하였다. 이근삼 교수는 박윤선 목사가 사모하던 화란에서 유학하면서 문화적 개혁주의를 익히고 고신교회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환원 이후 고신교회의 역사는 고려신학교가 총회 직영으로 개편하면서부터 시작된 신학교와 이후 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와중에서 고신교회의 첫 정신은 많이 퇴색되었고, 실로 존재 이유조차도 불투명하여졌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순수한 신앙과 순결한 생활을 한국교회에 확립하는 것이 고신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한다.68) 그 실천 방안이 역시 기독교대학이라 하였으나, 이 대학은 고신파의 위상을 땅에 떨어지게 하고, 이제는 ‘고신파’라고 자칭하거나 부름 받기조차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일은 치리회나 치리회가 선임한 이사회 차원에서 일어났다. 고신교회 교인들은 직접 개입하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첫째로, 대학교를 학부모가 책임지는 기독교학교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 결정적인 문제는 파생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다.

        즉 둘째로, 치리회인 총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학교에서 나온 대학을 총회가 직영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총회는 목사와 장로 총대로 구성된 치리회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총회 직영을 고신교회의 직영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결과적으로 교인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셋째로, 기도로 간구하고 헌금으로 기부하는 교인들이 빠진 치리회가 사안을 행정적이고 정치적으로 다루고 처리하였지, 교인들과 더불어 공청회나 토론회 등을 열고 교인들의 관심을 고조시켜 직접 개입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교인이 빠진 상황에서 총회와 이사회는 부정적 의미에서 ‘교회정치’의 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69) 총회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독립신학교를 고집하고 이 때문에 초대 교장과도 결별하고 분리주의라는 비난까지 감수했던 초기의 정신은 사라지고, 신학교가 바로 교회정치와 교권과 갈등의 한중간에 서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넷째로, 교인들이 부모로서 유아세례에 기초한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치리회나 이사회조차도 문화적 개혁신학에 입각한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비고신교회 교인이 이사가 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고신대학교의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은 더 심각하게 표류하고 있다.

        고신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목회 현장이다. 목회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원리를 철저하게 따르지 않았다. 즉 신학교 교실과 목회 현장의 괴리는 평양신학교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 성장에 대한 관심으로 대변되는 목회 방법론이나 다양한 성령 운동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과는 무관하게 고신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심령부흥이나 교회부흥을 지향하는 교회는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물론 칼빈주의 교회까지도 신학적으로는 보수파 칼빈주의의 수정파인 18세기의 아르미니안주의 신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부흥신학은 구원의 주체적 체험 획득과 그것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동원과 그 효과를 신학적으로 인정하는 소위 신인협동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주의적, 경건주의적 신앙 체질을 가진 한국 개신교회들은 교파는 달라도 결국은 한 가지 신학, 즉 아르메니안주의의 신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70) 고신교회는 이런 극단적인 평가와는 상관이 없다고 변호할 수야 있겠지만, 현재의 고신교회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박윤선 목사가 경고한 대로 우리의 신학은 알미니안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조차도 아닌데도, 고신교회가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개혁신학은 ‘구호’에만 그치고 있다.

        신학과 목회 현장의 괴리는 고신교회만의 현안은 아니다. 특히 개혁신학은 미국에서도 착근(着根)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란계 기독개혁파에는, 화란 개혁파신앙과 칼빈주의가 미국이라는 토양에서 성공할 수 없는 외래 식물이라는 인식이 비교적 널리 퍼져있었다.71)

        왜 그들은 이런 인식에 도달했는가? 부흥운동의 여파로, 미국은 교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다원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의 불씨는 애초에 칼빈주의를 표방한 회중교회나 장로교회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나중에 유명무실해졌다. 테일러의 주도로 제2차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회심에서 죄인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결과적으로 칼빈주의가 행동적인 아르미니안주의로 변하고 말았다.72) 제1차 부흥운동은 선택, 섭리와 회심을 청교도와 개혁파 전통을 따라 이해했다. 이와는 달리 제2차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구원을 만인에게 제시하면서 청중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강권하면서 자기 구원의 책임을 부각시켰다. 서부의 부흥에서 주도적이었던 감리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 제시를 택하거나 거부하도록 자유를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니의 성공은 이런 대중적인 신학을 장로교도나 회중교도들도 수용할 정도로 번역시킨 것에 크게 의존한다.73) “언약에서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에게 은총을 내리시며 구원의 확신을 갖는 자들에게도 보증하신다. 이런 식으로 청교도들은 조건적 선택이라는 아르미니안적 사상을 피하면서도 그 사상이 조건적 언약으로 추구하던 바를 모두 다 도입했다.”74) 17세기에 아르미니안주의란 엄격한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을 전반적으로 지적하는 용어였고, 특히 미국에서 통용되었다. 주로 칼빈주의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역할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지칭한다.

        미국에 온 화란계 신자들은 성경의 계시와 언약 사상에 기초하여 삶의 모든 관계와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담은 칼빈주의의 흔적을 미국에 남기는 것이 자기들이 미국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이 원리를 가정, 교회, 학교, 사회와 국가에 적용하는 것이, 선교나 전도, 기독교 자선 단체를 설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개혁파의 입장은 미국식의 부흥이 아니라, 언약 사상의 함양이었다. 언약만이 신자들을 공동체에 집결하고, 오랜 발전의 역사를 지닌 기독교의 유산에 접목시켜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75) 화란계 미국 개혁교인들은 화란 정신의 도움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간에, 지배적인 신학적 분위기가 아르미니안적 경건주의인 미국에서 존립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척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76) 미국에서 화란 정신을 계승하고 혁신한 대표자들은 감리교, 개인주의와 주관주의, 지성을 희생시키고 감정을 강조하는 분위기, 일방적인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신앙으로 대치시키는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반대하였다.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저항하는 화란전통이 미국에서 치루는 대가는 적지 않다. 이 전통은 “내향적으로 발전하였고, 지역세를 면치 못하고 전체 미국 신학의 무대에서 대체로 동떨어져있다.”77)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벗어나기 위하여 결국 미국 복음주의와의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바로 부흥운동의 소산이다. 미국에서 화란 전통은 지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고 일방적인 영혼 구원을 선호하는 감리교,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를 저항했다. 이런 사조는 인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대치해버리는 아르미니안적 성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화란계 믹국개혁교회는 미국의 어떤 교파보다도 대륙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지만, 광대한 미국 상황에서 자기 정체성을 끝까지 지킬 수가 없었다.78)

        고신교회도 이와 유사한 상황 속에 있다. 고신교회는 성경중심적 보수주의의 영성과 칼빈주의적인 문화적 개혁신학을 아직도 융화시키지 못했다. 신조 중심적인 개혁신학의 교회론을 정착시키지 못했고, 일반은총의 원리와 문화적 개혁신학 위에 세워진 고신대학교에는 이 신학적 기초와 합의하기 어려운 난맥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수십 년간 소요가 있어왔지만 이를 근원적으로 퇴치하기 위한 신학적 논의는 아예 시도한 적도 없다.

        신앙고백과 신조에 대한 공적 선언과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지금도 목사, 장로와 집사 심지어 권사 임직 선서에 신조에 대한 자세를 묻는 항목이 있다. “본 장로회 교리표준인 신앙고백,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알고 고백하는 직분자가 얼마나 되는가? 예를 들어보자. 당회원인 장로가 “세례는 누구에게든지 단 한번만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고백서, 28장 7절) 실제로 재세례가 교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어느 누구 이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 게다가 재세례를 누가 집례하는가? 목사이다! 더욱 놀랍게도 신조를 아주 무시하면서 폐지시켜버리자는 목사가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문화적 개혁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지속적인 토론도 여전히 요원하다. 신조 중심적 개혁교회가 없는 문화적 개혁신학은 뿌리 없는 꽃과 같이 시들고 말 것이다. 초기에 고신교회가 고려신학교와 유지했던 관계가 이제는 고신대학교로 바뀌었다. 초기 고려신학교가 말씀대로 회개하며 기도하고 경건한 교역자를 양성하여 한국교회 전체를 개혁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현재 고신교회는 어느 것에도 본이 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신교회는 고신대학교와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정리하여 현재의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의미에서든 개혁주의일 수가 없으며,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틀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고신교회와 신학의 전망

        고려파의 근원적 문제는 ‘소수파’가 아니라, ‘소수파라는 열등감’이다. 부산, 경남이라는 지방이 아니라 지방주의에 빠진 자괴감이다. 신학적 소양의 부족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이다. 무엇보다 자기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부끄러워하는 당당함의 결여가 원죄라면 원죄이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 기준에서 본 자기 평가이다. 고신교회의 초기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자긍심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 그것은 수적인 유세나 외형적 자랑이 아니라, 지방적 소수를 세우셔서 중앙적 다수를 새롭게 하시려 하였던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때에만 나오는 힘이요 지혜이다.

        초기 고려신학교의 이념, “생활의 순결과 순교자적 교역자 양성”, 이 이념으로 무장한 목사가 장래 고신교회의 희망이라면, 박윤선 목사(혹은 한명동 목사)가 초안한 SFC 강령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일상에서 수행하는 교인이 한국의 소망이 될 것이다. 이 강령은 장로교 신조들을 신조로 삼아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며,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 교회의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나아가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삼는다. 생활의 원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다. 이것이야 말로 고신신학의 요체이다. 이대로 사는 삶 가운데 고신교회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형성될 것이요, 이 신학에 기초한 삶의 순결은 한국이라는 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실천 방안이다.

        1960년대 이후부터 한국교회에 교회성장 열풍이 불어오면서 박 목사가 이미 1954년에 예견이나 하듯, “장로교의 교역자들로서도 무의식적으로 알미니안 신학 사상을 가진 실례가 많으니 통탄할만한” 일이 고신교회 안에도 일어났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하여 박 목사는 성경을 바로 주경하고 신조를 가르쳤고, 신학생이나 목사들은 교회에서 그런 설교로 교인들을 먹였고, 교리교육으로 믿음의 기반을 단단하게 닦았다. 비록 독선주의자 등 온갖 비난을 받았고 소수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고신교회는 당당하였고 한국교회의 소망과 같은 존재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한국교회 안에는 ‘고려파는 달라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렇지만 교회성장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면서 고신교회는 자긍심을 잃기 시작한다. 이전의 고신교회 강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신조교육은 점차 사라졌다. 목회 현장에서 현재의 고신교회가 한국교회 안에서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가? 검증받지 않은 각종 목회 세미나에 고신 목사들이 그 비율에서 가장 많이 참석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신비주의적이고 이단적 성향을 지닌 집단들이 고신교회에 침투하여 혼란을 야기한다. 말씀대로 믿고 가르치는 칼빈주의와 장로교 신조와 개혁신학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 차라리 부당한 분리주의라는 비난이라도 당당하게 받으면서도 ‘그래도 고려파’라는 자긍심을 단단히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고신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79)

        한 때는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이 중요하다는 변증도 들려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을 겪고 난 지금은 그런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개혁신학은 “독립 인격”을 육성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도 사람을 위함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줄 안다.” 구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까지 나아가는 입장이 칼빈주의이다. 이렇게 박 목사가 제시하고 이 교수가 문화관을 확립하였으나, 이것이 교인들에게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목회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마 28:20). 이 명령은 세례에 기초한 기독교 문화관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이끈다. 단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목사의 일터이다. 교회 안에서 성숙한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은 목사의 몫이다. 그렇게 양육 받은 교인들을 일터인 세상으로 파송해야 한다. 교인들은 세상을 신국으로 만드는 군사이다.

        그런데 고신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메시지는 들려도 세상을 점령하게 독려하는 개혁신학의 설교는 듣기 어려운 실정이다. 목사가 설교의 선포로 교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고, 그들의 삶의 현장과 삶의 모든 순간이 신국을 만들 때에야 그 설교는 온전하여 질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은 세상을 신국으로 만드는 실험소와 훈련소이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총회 체제로는 병원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신국을 만드는 훈련소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고신교회의 역사를 잊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게 인도한 개혁신학은 고신교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펼친 보물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고신교회가 존속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삶의 순결은 초기 고려신학교가 추구한 회개 생활이다. 한국교회가 2007년에 ‘Again 1907’을 외쳤으나 참된 회개를 찾기가 아주 어렵다. 그런데 고신교회야말로 참 회개 생활에 기초한 삶의 순결을 이상으로 삼았다. 고신교회 목사는 이단의 돈을 받지 않고, 고신교회 성도는 주일을 성수한다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 고려신학교는 회개운동의 진원지였다. 이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상동 목사의 영적 통찰력과 믿음의 용기를 후대는 과연 이어받았는가? 실수와 부족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그분은 후예들이 쉽게 따를 수 없는 믿음의 용장임에 틀림없다. 굳이 학문적인 신학을 깊이 해야 그런 핍박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신학을 논하기 전에 이런 경건과 영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분리주의자가 아니며 우리는 분열주의자들의 후예가 아니다. 비록 신사참배 강요는 없지만, 성도는 누구나 고민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는데, 이 시대에 강요된 ‘신사참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는는 그것을 폭로할 영적 통찰력과 동시에 그것을 거부할 믿음의 용기도 필요하다. 이것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그를 포함한 출옥성도들은 자기 몫 이상을 해내었다. 회개에 기초한 개혁적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면, 굳이 고신교회가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신교회 안에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에 입각한 건강한 목회가 정착하여 교인을 양육하여 성숙하게 하며, 교회 안팎에서 순결한 삶으로 회개와 개혁에 착념하는 교인들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때, 고신교회는 역사적인 개혁신학의 흐름에 편승할 뿐만 아니라 이런 목회와 삶을 반성하면 진정한 고신교회의 개혁신학이 출현할 것이다. 회개와 개혁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순박한 ‘성경주의’를 따라 기도하면서 순결한 삶을 살아갈 때 회개와 개혁은 수반될 것이요 고신교회는 참된 개혁교회로 거듭날 것이다. 이런 개혁교회가 없는 한, 회개로 이루어지는 순결한 생활도 기대할 수 없고, 개혁주의는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환원 이후 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거울로 삼아 이제는 이 악습을 회개하고 참된 개혁파가 되자.

        마지막으로 미국 장로교의 현실을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미국 장로교회는 침체하다가 연합하였지만 그 침체를 막지 못하고 있다. 반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출옥성도들의 경건과 박 목사가 추구한 개혁주의는 소수파일 수밖에 없다. 경건과 신학에서 개혁파는 ‘좁은 문’에 해당한다. 신사참배 거부 정신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칼빈주의 문화관은 고신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말하며, 이 때문에 소수파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여도 고신교회는 존재할 이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여느 장로교단과 차별성이 없다면, 고신교회는 더 이상 존속할 이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나아가 이 좁은 문을 들어가면서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을 목사들에게 주셨다. 성숙한 성도를 신학교로 보내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여 순결한 경건과 개혁신학을 겸비한 목사를 양성하면, 우리만이 완수하여야 하는 엄청난 사명이 또 있음을 알 것이요 결실 또한 주어질 것이다. 곧 미래의 세계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의 성패가 우리 어깨에 메여졌다! 기도로써 능력을 받고 핍박 받듯 고난의 목회에 매진하여, 좀 당당한 ‘독선주의자’로 무던하게 전진하여 이 사명들을 완수하자!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