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선생: 나그네와 공교회주의자 투고

 

        칼빈 선생: 나그네와 공교회주의자

                                                        

        칼빈 선생은 평생 3번의 시민권을 가졌다. 파리 북쪽 100km 정도 떨어진 누아용에서 프랑스인으로 태어나서 30세(1539년)에 독일어권인 스트라스부르크 시민권을 얻었고, 50세(1559년)에는 불어권인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하나 채 5년을 살지 못하고 별세한다. 그 어간의 삶은 방랑과 도피의 연속이었고, 외국인이라는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그 방랑과 망명의 틈바구니에서 종교개혁자로 우뚝 발돋움하였으니, 고난으로 영광의 업적을 이룬 삶이었다.


        1. 방랑과 도피의 나그네

        14세에 고향을 떠난 선생은 파리에서 예비 과정을 마치고 법학을 공부한다. 먼저 파리에서 남쪽으로 135km에 위치한 오를레앙(1528-1533)으로 법학 공부를 떠난다. 그 사이에 오를레앙 남쪽 125km에 있는 부르쥬(1529-1531)에서도 잠시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전도유망한 인문주의자로 데뷔한 뒤, 만 25세가 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홀연한 회심’을 체험하면서 로마교의 미신의 수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방랑과 도피의 길을 걷는다. 선생은 평생 단 3번 고향을 방문하였고, 도피 이후 단 한 번만 파리를 방문했을 뿐, 평생 외국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27세(1536년)에 제네바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시의회와의 알력 때문에 2년 후에는 추방을 당한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3년 동안 훌륭하게 사역하였다. 제네바 시의회의 청빙을 받아 32세가 되던 1541년 9월부터 두 번째로 제네바 사역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첫 14년 동안 토착민들의 괄시 때문에 심한 어려움을 당하였다. 55세(1564년)로 별세할 때까지 마지막 9년 동안 제네바를 성시(聖市)로 반듯하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다.


        2. 제네바와 칼빈 선생

        선생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제네바의 인구는 1만명을 좀 넘었다. 선생이 별세할 때에는 2만명을 넘겼다. 제네바는 도시국가였다. 한 마디로 제네바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결코 대단한 곳은 아니었다.

        1527년에 종교개혁을 선택한 베른 시의회의 파송을 받고 파렐이 제네바에서 설교하였다. 결국 제네바는 1536년 초에 종교개혁을 선택한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당시 지배세력으로서 로마교회를 신봉하던 사보이공국으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는 의도도 작용하였다. 파렐은 이처럼 거친 사람들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빈 선생을 설득하여 시의회의 청빙을 받도록 하였다.

        시의회는 교회치리를 자기의 소관사로 보고, 목사가 의회와 협의하고 승낙을 받은 후에야 치리나 권징을 시행하게 만들었다. 베른 의회는 종교개혁을 택한 제네바의 도시국가들의 교회적 통일을 위하여 목회나 예배에 관한 통일안을 제시했다. 제네바 의회가 목사회와 협의하지 않고 먼저 통일안을 승인한 후에 시행을 강요하자, 칼빈과 다른 목사들은 설교단에서 이를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이에 시의회도 곧장 이들의 추방을 결정하였다.

        새로 임명을 받은 목사들이 제네바의 방종을 감화를 통하여 통솔하지 못하자, 시의회는 불가피하게 선생을 再청빙한다. 그런데 시의회 의원들이 누구인가? 바로 제네바의 토착세력들이다. 강단에서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성례의 순결한 시행을 위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감독하자 이 토착세력은 시의회를 장악하고 교회의 치리권이 의회에 있다는 점을 들어 선생을 공격하고 위협한다.

        선생은 제네바와 토착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청빙을 거절하였다. “하루 천 번 망가져야 하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도 파렐은 선생에게 복귀를 강하게 권했다. 결국 선생은 정 들었던 목회지를 떠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제네바로 가기로 결심한다. “제가 제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기 때문에, 제 심장을 제물로 잡아 주님께 제사드립니다.” SFC 배지가 웅변하듯, 이 말에서 손바닥 위에 심장을 놓아 바치는 칼빈의 문장이 나왔다.

        작은 도시 제네바는 좋은 목사를 청빙하여 큰 복을 누릴 수 있었다. 155년 이후에는 비로소 출교권을 당회가 행사할 수 있었다. 선생은 정치권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를 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장로교 정치를 확립하였다.

        목사는 설교단만 서있고 세상을 누비지 않는다. 목사는 기업가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지만,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을 칼빈 선생이 잘 보여준다. 칼빈은 생애 후반부를 작은 도시에서만 보냈지만, 그의 목회 사역의 열매는 이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제네바교회는 모든 개혁/장로교회의 모교회가 되었다.


        3. 피난민의 애환을 피난민은 안다

        선생이 나그네로서 제네바 토착민의 반발과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많은 이들이 제네바로 몰려왔다. 주로 프랑스 위그노가 많았지만, 낙스의 스코틀랜드, 화란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로부터도 왔다.

        당시 유럽 각국은 차이는 있었지만 개신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였고, 산 자들은 핍박을 견디거나 아니면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본토에서 친척들과 머물려면 로마교로 넘어가거나 국외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칼빈 선생은 핍박 중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로마교의 미신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경고였다. 나아가 신앙적 피난민들을 환영하였다. 이 때문에 제네바 토착민들과 시의회와 의견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1555년부터는 해마다 천명 이상의 피난민들이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이들이 모국어로 예배를 갖도록 주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재정적 후원도 도모하였다. 피난민들 중에는 고급 기술자, 상공업자나 학자 들이 많았다. 비록 재정적 난관은 있었지만, 제네바가 다방면에서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피난민을 돕는 일을 집사가 맡았다. 선생은 사역 초기부터 장로직분과 동시에 집사직분도 회복시켰다. 그런데 난민 중에서 유력한 자들을 집사로 세워 같은 난민들을 돌보게 함으로써 집사직도 활성화시키고,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제네바가 당면하게 되는 제반사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도하였다.


        4. 공교회주의자

        선생은 종교개혁의 많은 지도자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비록 나그네로 살았지만 안목만은 공교회적이었다.

        첫째는 자신이 등진 조국 프랑스에 남아있는 개혁교인들인 위그노가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애를 썼다. 대표작인 「기독교강요」를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한 것이나, 독일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칼빈은 루터 선생과 만난 적은 없다. 그런 그를 ‘이 시대의 사도’나 ‘아버지’로 불렀지만, 그의 공재설이 과격하게 발전하자 그에게서 받은 은덕은 잊지 않았으나 서신 교류도 끝이 난다. 루터의 동역자인 멜랑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와는 개신교 내의 연합을 위한 종교회의에도 참석하여 교제하였다. 이런 신학적 관심 외에도 위그노의 자유를 위하여 이들과 교류하였다. 즉 독일 황제 칼 5세를 반대하는 독일 개신교 영주들은 프랑스 왕과 군사 동맹을 맺기도 한다. 칼빈은 독일 개신교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 영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들이 다시 프랑스 왕에게 위그노에 대한 탄압의 중단을 촉구하도록 요청하였다.

        선생은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에게 많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사절을 보내기도 한다. 1559년에 첫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가 열렸는데, 선생은 고백서와 교회법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둘째로 선생은 종교개혁 진영의 일치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선생은 취리히의 불링거와 함께 1549년에 취리히 공동고백서를 발표한다. 구교와 신교의 분열뿐만 아니라 신교 내의 분열의 진원지인 성찬론의 일치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선생은 교회 연합의 일을 위해서라면 열 바다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 외 자신의 책이 나올 때마다 때로는 면식이 없는 군주들에게도 책을 헌정하면서 종교개혁의 진리를 변호하고 신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5. 나그네 칼빈 선생과 우리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소명에 응하는 삶 자체가 바로 나그네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시는 곳에 서서 일하며 순종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이다. 칼빈 선생도 이런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자기의 생각을 따라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를 깨닫고서는 원하지 않은 자리에도 섰다. 선생은 좁은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도 세계적인 안목을 가졌고, 공교회적인 관심으로 활동하였다.

        엄청난 교회성장이 점차 과거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도 나그네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시는 곳에 가서 순종하는 나그네로 살되 공교회적 안목의 계보를 잇는 사역자들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