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존 칼빈』 서평 투고

『이 사람, 존 칼빈』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교의학)

 

올해는 칼빈 선생의 출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1507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도시인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나서 피난민으로 살다가 1564년 5월 27일 제네바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선생의 전통에 서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선생의 가르침이나 사역을 아는 교인은 많지 않다. 선생을 소개하는 좋은 전기(傳記)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성약출판사가 2007년에 출판한 『이 사람, 존 칼빈』은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한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의 저자 반 할세마 여사는 성약에서 출판한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로 독자들을 이미 만났다. 저자는 신앙고백적인 자세로 칼빈 선생의 생애와 사역을 아주 쉬운 필치로 소개한다.


혹 이 책을 ‘읽기 쉬운 소설체로 쓴 전기’ 정도로 가볍게 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몇 쪽이라도 읽어 보면 저자의 연구가 깊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저자는 선생의 영적 성장 배경, 종교개혁 당시의 여러 환경과 선생의 개인적인 삶의 모습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잘 묘사한다. 가령, “사당과 성유물, 종교 행렬과 축일, 촛불, 종소리, 성상聖像으로 가득한 그 조그마한 성읍에서 이 법률 자문관의 둘째 아들이 자랐다.”(18)는 문장에서 선생의 어린 시절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3장(22-30)은 그 시절, 프랑스 안팎에서 벌어지는 믿음의 타락과 개혁 진영의 활동을 동시에 잘 보여 준다. 1531년 선생이 첫 저작에 몰두하는 동안 츠빙글리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46). 선생이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 묘사도 그렇다(110). 28장에서는 사망이 창문과 궁실에 들어온다는 말씀(렘 9:21)을 인용하면서 선생이 제네바에서 2기 사역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고 있던 1544-49년 사이에 사망한 군주들과 교황과 개혁자 루터 선생, 선생의 부인 이들레트의 사망을 기록한다. 연구자이면서도 독자를 배려하는 저자의 세심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직접 인용을 많이 하면서도 전거(典據)를 각주 형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가령 선생이 자필 약전(略傳)을 기록한 『시편』 주석(1547) 서문(52-54),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변서(185-186), 『기독교 강요』의 헌사(71-75)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간마다 『기독교 강요』나 『제네바의 교회 조직과 예배 규정』(124 이하), 『교회법』(210 이하), 그리고 제네바 시회의록과 치리회 회의록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요약하기도 한다. 그 외 대부분은 선생의 서신에서 인용한다. 서신을 주로 인용한다는 이유로 본서가 학술적으로 격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서신의 인용은 선생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강점을 지닌다. 저자가 학자연하지 않고 여성다운 섬세함을 구사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들을 먼 옛날 지구 저쪽에서 살았던 어떤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이웃 교회에서 분투하고 있는 목회자 칼빈 선생에게 인도한다. 말하자면 선생의 사역은 지속적인 개혁 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 쓴 빛나는 믿음의 생활을 이 반항적인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도입할 수 있겠는가?”(130) 선생은 교리와 이에 기초한 삶의 변화를 위하여 평생 투쟁하였다. 저자는 이것을 선생의 사역의 양면, 즉 교리와 교회법으로부터 풀어 간다.


선생의 사역에서 교회법이 지닌 의미부터 살펴보자. 선생은 제네바에서 1536년부터 18개월의 사역을 한 후 시의회와 충돌하고 1538년 4월 말에 추방당한다. 시의회는 베른 시의회가 개신교 지역의 예전(禮典)의 일치를 위한 제안에 동의한다(138 이하). 문제는 의회가 목사회의 자문을 구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선생과 다른 목사들은 이 동의에 반발하고 제안의 일부, 즉 부활절에도 성찬을 베푼다는 안을 지키지 않았다. 이 문제의 배경은 베른의 제안 자체보다는 예배와 관계된 사안을 교회(또는 치리회)가 아니라 정부(시의회)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140). 물론 목사들의 개혁을 반대하는 죄인들에게 성찬을 베풀 수 없다는 확신도 함께 작용하였다(143).


선생의 제네바 2차 사역의 성패 여부도 결국은 교회법의 해석과 시행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치리회가 방종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베르텔리에에게 수찬 정지(受餐停止)를 처분한다. 그런데 시의회가 교회의 권한을 빼앗아 그에게 성찬에 참여할 권리를 회복시켰다. 이것은 “칼빈의 교회 정치의 중심”(282)을 향한 도전이었다. 선생은 추방을 각오하고 그의 성찬 참여를 경고하고 막았다. 시의회는 결국 1555년 1월에야 치리회의 출교권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1536년 제네바 첫 사역을 시작할 때 시의회에 제출했던 제안이 본래의 의도대로 시행된다는 뜻이다. “우리 주님의 성찬을 교회 안에서 상시로 행하지 않는다면 교회를……바르게 규제할 수 없습니다.……또한 경건한 마음과 진정한 경외심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지 않도록 바른 감독하에서 집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거룩하게 보전하기 위해 출교黜敎의 권징이 필요합니다.”(125) 성찬 참여 여부를 결정할 자격은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천명한다. 시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다가 1555년에야 선생의 주장과 해석을 문자대로 수용하였다.


선생이 교회법에 대해 취한 단호한 입장은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칼빈은 하나님 말씀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관한 문제는 타협하지 않았다.”(175) 선생이 주장한 교리 중에는 선택론도 있다. 선생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나왔다. 선생은 이미 25세도 되기 전에 성경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지도자였다(57). 이 지도자가 이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제시하여 도움을 주고자 쓴 책이 『기독교 강요』이다(70). 선생은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대의, 곧 그리스도 그분의 대의를 변호”(72)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종합적인 교리 체계를 끌어낸 위대한 저서로서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며,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다.”(76; 참고. 71) 이 요약은 짧으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선생은 교회법을,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고 그대로 생활하도록 돕는 방편으로 보았다. 제네바 사람들은 방탕하였고 억셌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세로 싸웠고, 그 자유를 얻고 나서는 일상적인 방탕한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선생이 이들에게 『신앙고백서』의 진리들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게 하자, 제네바의 토착 방종주의자들은 선생에게 도전한다(122 이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가르칠 때 따라오는 필연적인 저항이다. 선생은 평생 동안 이런 방종주의자들과 투쟁하였다. 특히 교회가 출교권을 획득하기까지 선생은 끊임없이 이들의 위협을 받았지만, 늘 꿋꿋하게 말씀을 따라 가르치고 교회의 권리를 단호하게 사수하고 행사하였다.


저자는 교리와 교회법의 두 각도에서 본서를 전개한다. 낙스는 조국 스코틀랜드를, 칼빈이 가르친 교리와 교회 정치를 따르는 장로교회의 발상지로 만들었다(293). 이리하여 한국에까지 장로교회가 도래하였다. 그렇지만 교리나 교회법에서 한국 (장로)교회는 선생의 관점과 자세를 제대로 전수받지도 못했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 점에서 ‘별종’의 장로교회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선생의 다정다감한 인간적 면모를 소개한다(243). 선생의 자평과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저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한 편입니다. 역경에 맞설 자신도 없습니다. 게다가 몸도 자주 아픕니다. 그러니 저는 서재에나 있을 사람입니다.”(111) 실제로 선생은 공적인 사역의 청빙을 받을 때마다 이런 조건을 내세워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건강도 참 좋지 못했다(268). 그렇지만 선생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에서 점차 담대하여졌다. 특히 제네바의 개혁을 위하여 시의회와 자주 맞서는 모습은 자평과는 영 다르다. 말씀과 성신님의 손에 붙잡힌 사역자의 담대함이다.


이 담대함으로 무장한 선생은 안목을 제네바에만 국한하지 않고 신교 교회 전체로 향하였다. 즉 교회 일치를 향한 선생의 열정이다. 당시 구교와 신교, 그리고 신교 진영 자체를 갈라놓은 교리적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곧 성찬론이다. 선생은 이 문제를 독일 루터파와 논의하였고, 취리히와 협의하여 거의 스스로 기초한 취리히 일치 신조(1549년; 248)로 스위스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또 교회 일치의 문제라면 “열 개의 대양大洋을 건너는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겠다.”(250)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저자는 선생과 개혁교회가 지닌 공교회적 자세를 멋지게 보여 준다.


저자의 필치는 평이하고 섬세하면서도 개괄적으로 칼빈 선생의 사역과 업적을 잘 묘사한다. 이 점에서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가 본서를 교회의 다음 세대인 청소년을 위하여 번역한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칼빈 선생을 언약의 다음 세대가 배우는 것은 언약적 사건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모든 장점과 강점을 가진 본서에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반부와는 달리 33장부터는 연대 표기에 인색하다. 교리와 교회법에서 제네바가 안정을 찾는 투쟁의 기간을 잘 묘사한 반면, 그처럼 힘들고 험악했던 선생의 사역이 열매를 거두는 기간이 불과 생애의 마지막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드러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이나 청소년들이 목회나 성도의 삶이 어떤 투쟁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잘 직시할 수 있었을 터이다.


부피가 크지 않은 책이다 보니 본서에서 강조받지 못한 선생의 사역도 있다. 선생이 자기 조국의 개혁교회 형제자매들의 안녕을 위하여 애쓴 일은 고귀하다. 이미 『기독교 강요』를 당시의 프랑스 왕에게 헌정하면서 자신들의 교리가 순수함을 입증하고 신앙적 핍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 선생은 조국의 교회를 위하여 (신앙고백서와) 교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다(304). 그런데 선생은 이보다도 더 활발하게 조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제네바 교회나 자신이 사절을 프랑스로 보내어 형제자매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또 프랑스 왕과 대립하던 독일 황제에게 간접적으로, 선제후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연락하여 프랑스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부분이 좀 더 강조되었다면, 피난민으로 살았고 사역한 선생의 모습이 더 부각되고 형제자매들을 향한 믿음의 우애도 돋보였을 것이다. 또 개혁 교인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저자가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합하지 못한 해석도 나타난다. 선생은 제네바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파렐 목사에게 경과를 서신으로 보고한다. 그 중에 “그러고 나서 몇 가지 점들을 부드럽게 언급했습니다.”라는 말이 들어있다. 저자는 이에 근거하여 “‘확고하게, 그러나 부드럽게’”(203)라는 선생의 자세의 변화를 강조한다. 제네바 첫 사역에서 시의회와 종종 충돌하였던 일을 되돌아보게 하는 듯하다. 즉 스트라스부르에서 안정된 목회 사역을 경험한 선생의 인격적 성숙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은 2기 사역에서 이전보다는 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선생의 편지에는 ‘부드럽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저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참고한 서신의 영어역의 문제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저자는 칼빈 선생이 제네바 1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문서를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고 한다. 『신앙고백서』와 “또 다른 문서”(123)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문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독자들이 혼란을 당할 수 있다. 18장 초두부터 요약하고 있는 이 ‘다른 문서’는 출교, 혼인, 자녀 교육과 시편 등 네 주제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다. 그 이름은 『제네바의 교회 조직과 예배 규정』이다. 또 다른 서술도 혼란을 일으킨다. 시의회는 이 문서가 제안한 성찬과 출교 문제는 수정하여 곧장 통과시켰다. 따라서 “의회는 시간을 질질 끌었다.”(128)는 표현이 『신앙고백서』에 대한 서명 작업을 말하면 옳지만, 『규정』의 통과와는 무관하다. 선생은 『규정』에 나오는 자녀 교육을 위하여 『교리 교육서』도 작성하였다(129). 그런데 한역에는 “요리문답”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이 『교리 교육서』는 문답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이 지적과 동시에 이제 번역을 살펴보자. 번역은 아주 탁월하다. 비록 원저가 쉽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본서의 번역은 꼼꼼한 작업의 결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초역자의 수고와 다른 이들의 협력이 잘 아우러진 번역이다.


굳이 지적하여 보자면, 한 용어를 다르게 번역한 경우이다. ‘치리회’(203, 209), ‘교회 정치’(211, 282), ‘교회 정부’(304)는 원저에서 한 용어(government)이다. 그런데 치리회는 이미 다른 용어(consistory)의 역어로서 저자가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정부’라는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교회 정치’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정치’라 번역하지 않다 보니 ‘안정된 치리회의 협력’(203)이라는 번역도 등장했다. ‘협력’으로 번역된 라틴어 원어는 ‘합의하다, 제정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안정된 교회 정치의 제정이 필요하다”로 번역하면 그 뜻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지적들이 본서의 가치를 결코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을 칼빈 선생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잘 조명하면서 다음 세대의 언약 백성들에게 신앙고백적인 필치로 이 유산을 전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번역도 뛰어나다.


이 책은 청소년 교육에도 적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나 목회자에게도 유용한 자료이다. 선생의 출생 500주년을 맞아 본서는 한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을 반성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진심으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