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선생 출생 500주년 기념강좌(중간 평가) 투고

 

칼빈 출생 500주년 기념 강좌

                                                                선지동산: 고려신학대학원 소식지, 2009,7월호

 

        “한국의 칼빈주의자들은 정작 칼빈을 읽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는 기념 강좌였다. 2009학년도 1학기에 8명의 교수들이 각자의 전공 분야를 따라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경건회 시간을 이용한 짧은 강좌였지만, 발표자나 청중인 원우들에게 다 유익하였다.

        우리는 교리에서는 개혁파이고 교회정치에서는 장로정치를 표방한다. 이 양 측면을 정립하고 전수한 이가 칼빈 선생이다. 그렇지만 그가 교리나 정치를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은 결코 아니다. 대범하거나 독창성을 내세울 정도로 별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남 앞에 나서기보다는 그냥 뒷전에서 조용하게 공부하고 책을 쓰는 것이 자기 성격에 걸맞다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생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홀연한 회심을 겪게 하시고 불같은 성격을 지닌 파렐을 사용하시어 그를 거친 제네바 사람들의 선생으로 세우셨다. 일단 사역자로 세움을 받자 온 몸을 던져 열심히 일하였다. 결국은 말씀을 거부하는 지도층의 배척을 받아 추방당한다. 공부에만 몰두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좀 안정된 곳으로 불러 부쳐와 같은 좋은 선배로부터 목회 경험을 쌓고 종교개혁의 지도자들과 교류하게 하셨다.

        제네바는 선생이 아니면 정치적 자유와 영적 안녕을 누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再청빙한다. 선생은 고민하고 고사하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파렐을 통하여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셨다. “제가 제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기 때문에, 제 심장을 제물로 잡아 주님께 제사드립니다.” 이 말에서 선생의 좌우명이 나왔고, SFC 배지도 이에 근거한다.

        再사역 중에도 선생은 많은 공격과 비난과 위협을 만났다. 사역을 그만 두고 떠나려고 마음을 먹기도 자주 했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투쟁 속에서 선생의 업적이 나왔다. 이처럼 교리와 치리에서 남긴 유산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선생의 독창성은 독창성이 없다는 데에 있다. 선생은 늘 기도하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래서 비록 작은 도시국가요 로마교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도 소수파의 열등감에 빠진 적이 없다. 공교회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합법적인 계승자요 또 이 전통을 전승해야 하는 사명자라는 확신으로 충만하였다.

        당대의 석학인 선생은 첫 사역부터 교리와 치리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그것을 실제로 목회 현장에서 시도하였다. 그러나 머리의 판단과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현장의 괴리는 목회 자체를 통하여 깨달았다. 따라서 선생의 신학은 책상을 떠나서 말할 수도 없겠지만, ‘책상머리신학’은 결코 아니다.

        여덟 강좌는 신학과 목회의 통합을 시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학기에도 요리문답 교육, 십계명의 실천, 교회법과 시편 등 보다 더 현장과 가까운 주제들을 가지고 강좌가 이어질 것이다. 모든 강좌가 끝이 나고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칼빈 선생의 후예로서 더 당당한 공교회적 전통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개혁교인이요 동시에 목사후보생으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