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들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시편 1편 기본 카테고리

시편 1편

악한 자들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2003/9/25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기윤실 간사님께.
오늘은 시편 1편을 묵상하였습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저의 석사학위 논문을 칼빈의 시편해석방법에 관해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선 시편을 히브리 원문으로 차근히 읽는 일을 먼저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편 각 장을 먼저,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고, 이어서 헬라어 성경 (셉투아 진트, 주전 2세기에 번역됨), 라틴어 성경 (벌게이트, 5세기에 제롬이 번역), 독일어성경 (16세기 루터가 번역), 화란어 성경, 그리고 불어 성경을 읽고 묵상 기도 한 후에 말씀나눔의 글을 적습니다.
저는 성경이 과거의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임을 믿습니다. 과거 처음 기록한 성령님은 시대 시대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제가 성경을 읽을 때 기록된 문자와 함께 강하게 일하시는 성령님과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오늘 나와 우리 개인들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귀기울이는 데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언어로 당신의 말을 하시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면 그 분이 말씀하신 언어적 표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성경학자들이 하듯이 다른 고대문서와 성경을 비교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경문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약간의 유익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요즘 성경학계는 성경을 세심히 연구하는 것보다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오히려 방해를 줍니다.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람들이 교회의 돈을 받고, 자기도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처럼 되지 않나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성경의 언어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성경 자체의 원문의 표현을 잘 관찰하는 데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각 단어와 표현들이 시편의 다른 부분에서,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 즉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시편의 한 편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시편 1편을 앞에 두고,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한 장을 묵상하였습니다.

이 시편은 흔히 “축복 (Beatitude)”라고 하지만, 실은 복과 심판의 두 길 중에서 복에 서 있는 사람들의 복을 노래하기에 저는 차라리 “복과 심판의 노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3은 복된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이 누리게 되는 복의 내용, 4-6은 악한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이 받을 심판을 노래합니다.
복된 사람의 특징은 우선 악과 죄의 길을 걸어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에 강한 의지를 두고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하며 의로운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는 감정적인 좋아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을 포함한 “의지”의 즐거움입니다. 그리스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은 “의지” (텔레마, 볼룬타스)라 번역하고 있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두고 감정이 끓어오르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며 그래도 살려는 뜻을 가지고 성경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는 듯 합니다. 우선은 성경을 사랑하며 많이 읽고 그 뜻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만 하고 삶은 엉망인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다. 성경은 읽고 교회에 가지만 부패사건마다 등장하는 그런 비윤리적 그리스도인을 두고 복되다 하지 않습니다. 여기 복된 사람은 성경의 뜻을 따라 악과 죄에 빠지지 않고, “의의 길” (6), 즉 의로운 삶,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기윤실 초기부터 한국의 보수교회는 손봉호는 자유주의자다, 기윤실은 자유주의적이다 하는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2년 전 광림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문제로 여전도회관 강당에서 세미나를 할 때 기물을 파괴하고 폭동을 부린 광림교회의 한 여성도는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윤리가 뭐냐, 성경은 믿음을 이야기 하는데”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하는 폭력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제대로 묵상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의와 공평과 정직을 실천하게 됩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물을 흠씬 빨아 들여 그 수확의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은 상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삶과 창조질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 김인수 교수님께서 가정생활 세미나 인도하실 때 종종 말씀하셨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가정 생활의 매뉴얼입니다. 자동차 운전자 매뉴얼이 자동차가 어떻게 작동하고 잘 운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면 의의 열매를 맺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악한 결과를 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행하는 자라야”라고 가르쳤습니다 (마 7장). 요나단 에더워드 (18세기 미국 신학자, 부흥설교의 목사)도 신앙은 감정과도 관련되어 있니지만, 생활의 실천이 더 중요한 신앙검증의 잣대라고 말했는데 참 공감입니다. 19세기의 부흥운동가 찰스피니의 고민도, 왜 기독교인들이 교회는 출석하는데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에 있었고, 그의 부흥운동은 성화의 삶, 거룩의 삶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있었기에, 그는 노예제철폐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복된자의 특징이라면, 그 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하는 모든 일이 번성하는 것입니다. 번성은 의도한 일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서 성공적으로 신부감을 찾는 데 사용한 단어입니다 (창 24장). 형통하고 잘 되고, 기쁨이 넘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실은 복있는 사람의 삶의 특징 혹은 자세와 그 복의 내용은 실은 하나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 것 (복된자의 특징,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감)과 열매를 맫는 것 (복: 형동)을 개념적으로 분리할 수 있지만 실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말씀에의 순종은 내가 자신을 쳐서 말씀에 굴복시키는 행동이지만, 그 행동은 바로 열매맫는 행동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적 의무요 윤리적 실천이고, 열매맺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윤리와 행복은 오직 한 나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들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1993년 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창 기윤실에서 많은 위원회를 조직할 때 청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송인수 선생, 류지성 선생, 곽재원 선생 등이 당시에 멤버였습니다. 숭실대 사회봉사관에서 모인 어느 모임의 식사후, 김인수 장로님은 어떻게 성공적인 청장년기를 보낼 것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야망을 버려라”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요지는, 우리가 야망에서 욕심과 계획을 많이 세우는 대신, 요한복음 15장 처럼, 오직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나무가 자연히 열매를 맺듯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믿으면 건강하고 돈벌고, 그것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상숭배하고 사기쳐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복만 가지고는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순종의 결과로서 나타난 번성, 윤리의 결과로 나타난 행복만이 참 행복입니다.
그렇지 않은 행복은 악한 자들의 소위 복입니다. 시편 73편에서 부르짖었듯이, 왜 악한 자들이 잘 되는가? 왜 선한 동기로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 뿐 아니라 비난을 받고 다시 손해를 보아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시편 기자는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운동 때문에 우리가 6천만원이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이 당혹한 현실을 두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의 대가로 그 때 공연수익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왜 손해배상을 청구합니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 끼친 사회적 해악들 때문에 그 기획사의 소위 “기독교인 사장”이 청소년과 국민에게 손해배상금을 내어, 청소년 기금이라도 조성해야 할 판에 우리가 손해배상을 해야 하다니.  민사소송을 낸 그 사람도 문제지만 재판을 맡은 판사도 바른 정신인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공익을 위해 희생한 우리 권총무와 손봉호 교수님, 우리 간사님들과 기윤실에 돈을 뜯어 가려는 그 사람은 돈을 챙기는 그 사람과 이것을 법을 통해 강제하는 우리 법원이 우선은 잘 되어 보일지 모릅니다.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은 비윤리적 탈법을 한 단체로 비난받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 당신이 약속한 번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악인들은 왜 번성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편의 마지막 말은 왜냐하면 (대저)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의 길은 알아 주신다.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아신다. 이 당의 법정에서는 우리를 잘못됐다 말할지 모르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우리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의인을 악하다고 결정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주십니다.
그러나, 그러나. 시편의 마지막 말입니다.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우선 잘 돼 보이고 웃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그런 길은 망하는 길이다. 그들의 번성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행복은 있을 지 모르지만 이리 저리 방황하고 우왕좌왕하며 혼란속에 빠진 행복입니다. 내면에는 평화가 없는 그런 웃음입니다. 결국 지옥으로 인도하는 그런 길입니다. 우리는 악인이 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악한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시편의 원래 뜻이 그런지 모르지만, 악인은 망한다고 하지 않고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한 것은 죄인들과 죄의길을 분리함으로서 악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구원의 길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최종적인 길은 윤리는 행복의 길이요 비윤리는 죽음의 길입니다.
이 복과 심판의 노래는 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원래의 질서에 대한 비전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의 아름다운 장면은 에덴 동산과 너무 유사합니다. 열매 (창 1:11,11,12,29).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네 강 주위에 심기워진 나무들이 번성하고, 이 세계가 번성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제 그 낙원은 사단과 악인에 의해 이 땅에 죄와 불행이 넘치는 고통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롭게 의인의 무리를 선택하여서 당신의 참 복의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에덴동산의 복은 교회와 성도가 누리는 복입니다. 여전히 악인들에 의해 방해받지만, 그러나 우리 주심 다시 오셔서 완전히 회복할 복입니다. 그 새하늘과 새 땅에 강이 평화로이 흐르고 강 주위에 심기진 나무들은 잎이 무성하여, 이 땅의 죄와 고통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과 이 땅을 “치유”할 것입니다 (계 22). 에덴 동산과 하늘의 도시사이에서 오늘도 우리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말씀과 윤리적 삶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추억의 노래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의와 행복이 넘칠, 오시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든 사역과 죄와의 사움과 고통의 현실에서의 발버둥 속에 우리는 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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