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지혜: 삼하 20장 기본 카테고리

평화를 위한 지혜

삼하 20장 (2003년 9월 16일)

유해신

어제 오늘은 삼하 20장을 묵상하였습니다. 저의 가족들과, 또 가족 같은 기윤실 간사님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20장 마지막 절에 다윗 왕의 핵심 7가지 고위관직자의 명단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아 성령께서는 20장이 다윗왕조의 안정화를 위한 오랜 노력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삼하 1장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에 시작하여, 요나단의 절름발이 아들 므비보셋에게 토지를 다시 돌려주고 왕자와 함께 먹고 마시게 하는  등 (9장) 다윗은 새로운 왕조교체가 복수극이 되도록 하는 대신 새로운 평화의 시대, 하나의 공동체의 시대를 열어가게 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오랜 노력이 20장에서 결론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왕조가 안정되는 그 간 다윗왕은 두가지 위기를 격어야 하였습니다. 첫째는 사울의 가문의 도전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이 그 군대장관 아브넬의  도움으로 사울의 가문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울-다윗 사이의 왕권다툼 전쟁이 일단락되었고 (2-4장) 북쪽 이스라엘 지파의 동의로 이제 남북지역을 다스리는 통합왕이 되었습니다 (5장), 다윗이 그토록 후대한  므비보셋의 은근한 반란음모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베냐민 지파 사람 시바가 온 이스라엘 사람을 선동하여 다윗의 유다 중심의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 반란군에 대한 진압이 오늘 20장이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큰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 끼어드는 것이 주위나라들과의 대외전쟁과 다윗 자신, 자기 가문의 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둘째, 외부의 적들은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잘 정복해 갔습니다 (8장, 10장-암몬 정복, 다음에 나오는 21장 블레셋 정복). 셋째 가장 문제는 다윗 자신의 죄의 문제와 그 아들의 죄의 문제, 그 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었습니다. 암몬정복 와중에서, 그가 범한 간음죄, 살인죄, 거짓증언죄 (11장)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예고 (12장)는 먼저 첫 왕자 암논이 셋째 왕자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 하는 것으로 실현되었습니다 (13장). 다윗의 간음죄에 대한 심판은 다시 그의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압살롬 왕자는 그 형 암논 왕자를 잔치자리에서 살해하고 (14장), 마침내는 아버지 다윗왕에 대한 강력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4장).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아버지를 속였고, 압살롬이 아버지를 속여서 반란을 일으키는 곳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들을 피해 예루살렘 궁궐을 떠나 도망하면서 (15-16장), 사울의 종 시므이의 저주를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그가 거짓으로 우리야에게 평화를 말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인 듯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다행히 다윗에게 충성하는 후새가 암살롬 반란군의 핵심참모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여 다윗은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요단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할 수 있었고, 결전의 전투에서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였습니다 (17장). 다윗의 승리는 실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심판은, 다윗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군대사령관 요압이 암논을 살해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18장). 그는 아들의 공격에서 자기 생명을 살린 후 다시 그 아들의 죽음 때문에 대성통곡하여야 하였습니다.  
다윗의 실패와 통곡은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통곡이었습니다. 그 통곡을 음운을 살려 번역하면,
“ ‘샬롬의 아버지’ (압살롬 이름의 직역)에게 샬롬이 있는가?” (삼하 18:32) 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통곡합니다. “내 아들, ‘샬롬의 아버지’야,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샬롬의 아버지’야, 누가 널 대신 내가 죽게 해 주었다면. ‘샬롬의 아버지’야,  내 아들아.”  그 샬롬을 부르짖었던 다윗은 다시 요단강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전에 그를 혹독히 저주하였던 시므이를 용서함으로써 그 자신 샬롬을 이루는 왕이 되기를 결정합니다 (19장).
여기서 오늘 말씀 20장이 이어집니다.  샬롬을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울의 가문이 베냐민 출신이며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시바 (‘맹세’ 혹은 ‘서원’이라는 뜻)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여 다윗 왕을 버리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윗왕을 통해 우리에게 기업이 없다” (20:1) 즉 다윗왕을 왕으로 세워봤자 이익될 것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왕궁에 들어간 다윗왕은 그 아들 압살롬에게 잠자리 시중을 든 10명의 후비들을 별궁에 감금하고, 평생 음식만 주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벌을 내렸습니다. 언뜻보기에 다윗의 후비들도 압살롬에게 성폭행을 당하였데, 다윗은 너무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후비들은 강제로 당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주 다말은 배다른 오빠 암몬에게 성폭행 당할 때 힘을 다해 저항하였을 뿐 아니고, 그  후 재를  쓰고 옷을 찢으면서 그녀의 통분을 토로한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다윗의 후비들에 관해서는 그런 기록을 전혀 읽을 수 없습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그 후비들은 아예 다윗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압살롬이 계속 왕위에 머무를 줄 알고,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압살롬에게 성적 서비스를 한 것 같습니다.
후궁들을 감금 (차라, 3) 한 것은 반란군 대장 시바를 성에 포위 (차라, 15)한 것과 거의 유사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들의 반란에 동조한 후궁들과, 그리고 다윗에 반기를 든 베냐민 지파의 시바에 대한 포위는 다윗왕권을 확고하게 하는 마지막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군 토벌대장 요압장군은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같았지만 다시 다윗이 정한 정식 사령관 아마사를 살해하여 또 다른 문제거기가 됩니다 (4-14).
그런데, 시바가 도망해 숨은 아벨 성 밖에서 요압 장군과 그 성의 한 지혜로운 여인의 이야기는 마치 12장의 나단 선지자, 그리고 14장의 한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예언적 음성인 듯합니다. 성령께서는 밧세바를 통간하고 우리야를 죽인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 회개를 촉구하였고, 다윗은 달게 순종하였습니다. 이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이전에 압살롬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한 지혜로운 여인”이 “살해”를 하지 말라고 다윗에게 권고하였고 다윗은 그 말을 달게 들었습니다 (14장). 이제 오늘 아마 요압은 기세등등하여, 반란군 대장을 숨겨둔 아벨 성을 공격하려 하자, “지혜로운 여인 (14:2,20: 20:16,22)이 살륙하지 말 것 (14:11’ 20:15,20)을 강권하여 요압은 오직 오직 시바만 죽이고 성은 온전히 보전하였습니다. 14장과 20장의 이야기는 너무 많은 점에서 유사합니다. 특히 계속반복되는 “여인이 말한다 (아마르-16,17,17,17,17,21,22, 다바르, 16,17,17,18,21)는 말은 선지자 나단을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나타내기 위해 많이 쓰인 단어입니다.
한 여인의 지혜로운 말, 그것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예언자들의 예언적 음성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륙극을 그만하라. 사울과 다윗 가문의 싸움, 다윗 가문에서의 형제, 부자간의 살해극,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백성의 싸움, 이제, 예루살렘 지역의 아벨 성의 주민까지 초토화하려는 요압장군은 하나님의 선지적 음성에 직면하였습니다. 다행히 요압 장군은 그 말에 순종하였고, 성령께서는 바로 이어서 다윗왕권이 안정되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주요 7 고관의 명단을 통해 나타냅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샬롬의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자들이 힘과 폭력으로 가문과 민족을 파괴할 때 연약한 여인, 남자들에 의해 소유되기도 하는 그런 여성을 통해 예언의 음성을 주셨습니다. 살해하지 말라는 예언의 음성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평화, 샬롬은 20장에서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샬롬의 아비’, 압샬롬 보다 더 위험한 ‘맹세’ (시바)의 공격 속에서, 비록 요압은 “샬롬” (9)이라는 인사를 하면서 동료 아마사 장군을 살해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요압 다윗의 군대가 “샬롬의 도시” (예루살렘, 7,22)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살해하지 말라는 여인의 말을 들은 요압도 샬롬의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다윗왕의 이스라엘의 평화는 주위 나라들이 침략과 다윗 아들들의 죄,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 자신의 죄에 의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샬롬의 아비” 압살롬의 죄악, 그리고 “샬롬”이라 인사하며 형제를 죽이는 요압, 그 가운데 이 평화가 다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당신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하나님 당신의 약속에 당신은 충실하시기 때문에 지속적인 샬롬을 허락해 주십시다 (삼하 7장).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건 샬롬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지와 지혜있는 선지자적 여성을 통해서 당신의 샬롬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샬롬을  위해 다윗과 그의 장군 요압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당신의 지시에 순종하는 회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샬롬이 유지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회개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자비에 있습니다. 다윗 왕조를 통한 이스라엘의 샬롬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안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죄악가운데 항상 위협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남의 땅에서,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지배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그들은 이 삼하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읽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우상숭배와  자신들의 거짓과 사회적 억압을 회상하면서, 얼마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해쳤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은 전 민족적으로 회개하며 다시 새 출발을 각오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조상들에 의해 하나님의 샬롬이 망쳐지는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소장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뿐 아니라, 예수님 오실 때,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망쳐진 샬롬, 분쟁의 현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자비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자신들이 죄 때문에, 교회의 죄 때문에, 세상의 죄 때문에 망쳐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와 지지만 샬롬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입니다. 요압이 아벨 성을 전멸하려 하였듯이 우리들도 작은 일로 형제를 욕하고 형제를 파멸시키려 합니다. 너무나 종종 사회정의를 위한다고 하면서 불의한 일을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회정화위원회”의 이름으로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였지만 그 정권은 독재정치와  정부의 공금 횡령을 하는 온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교회 개혁을 말하지만 우리 자신의 죄는 회개치 않고 우리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죄인된 모습입니다. 샬롬을 만들기 위해서라 하면서 샬롬을 망치는 것이 우리입니다. 다윗이 그랬고, 요압이 그랬습니다.
이런 대책없는 우리에게 샬롬의 왕이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은혜와 샬롬”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이 함께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은혜와 샬롬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은혜의 사랑, 우리죄를 용서하고 우리에게 거저 줌으로써 당신은 샬롬을 회복하십니다. 먼저는 우리와 당신 성삼위 당신 사이에 샬롬을 회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샬롬을 누리자 (롬 5장), 오직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정의와 샬롬과 기쁨에 있느니라 (롬 14:17). 샬롬의 방법을 전한 지혜로운 여성 처럼 이제 지혜의 성령에 충만한 당신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교회공동체를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평화없음에 성령께서는 평화를 위한 방법을 계속 가르쳐 주십니다.
샬롬의 왕, 샬롬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전대미문의 일을 하심에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분쟁하고, 마음에도 평화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우리의 투쟁과 실패 가운데, 우리 자신이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샬롬과 우리의 죄 사이에 비틀거리며 살지만,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다듬어 져 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때에 우리에게, 온 우주적인 샬롬을 이루실 그날, 우리는 기뻐 춤출 것이기에 소망가운데 우리는 살아갑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샬롬의 이름으로 살해하고 분쟁을 만드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은 정직히 지혜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아직 변화되지 않은 우리들의 추한 모습을 항상 회개하고 설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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