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삼하 16:1-14) 기본 카테고리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2003년 9월 10일)
삼하 16:1-14  

오늘은 삼하 16:1-14를 묵상하였습니다. 전에는 이 부분을 그냥 다윗이 비참하게 도망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또 그 고통가운데서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치는 복음서로 다가왔습니다.
이야기 첫 장면은 사울의 종이며 대를 이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섬기던 시바가 다윗 피난 팀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1-4). 시바는 원래 9자에 등장하였던 시바가 여기 갑자기 등장한 것은 성령께서 구약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기 위함인 듯합니다. 시바의 이름은 아주 상징적인 듯합니다. 시바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서의 만군, 즉 “시바옷”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7장에서 다윗왕권이 영원히 번성하리라는 여호와의 언약 약속에서 많이 쓰인 이름입니다 (7:8,25, 27) 거기 여호와는 부드럽기만 한 신이 아니라 모든 전쟁을 주관하고 어떤 군대 보다 뛰어난 거룩한 전쟁의 여호와였습니다. 힘이 있기에 다윗 왕권을 보존할 분입니다. 그 앞에서 다윗은 “왕”이 아니라 봉신 (vassalage), 혹은 종으로 서게 됩니다 (7:21,26). 비록 다윗은 능한 전사였고 장군이었지만 그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써 여호와의 전쟁을 지휘하였습니아. 만군의 여호와는 먼저는 당신의 예배가운데, 바로 법궤가운데 임재를 보였습니다. 법궤는 만군의 여호와의 법궤로 이름하였습니다 (6:18)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정복전쟁에 승리한 다윗은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사울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수소문 한 결과 다윗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보셋을 섬기던 시바를 만났습니다. 시바,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가문에 자비를 베풀어서 시바에게 사울의 원래 재산의 상당부분을 돌려주고, 그것으로 므비보셋을 공양하게 하였습니다 (9:11)
이제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운 대신, 만군의 여호와의 명예에 먹칠하며 밧세바를 간음한 결과 만군의 여호와의 적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가운데, 그 심판의 도구인 자기 아들의 반란을 피해 피난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시바를 만난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무언가를 하실 것 같습니다. 시바는 음식을 공급하고 다윗에게 왕으로 인정하는 절을 올리고, “은혜를 입는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 이 장면은 실제 사실이지만 마치 비유의 기능을 합니다. 시바의 이름에 나타난 만군의 여호와, 시바의 말에 나타난 은혜를 입는다. 이 말은 모두 다윗의 상황에서, 그리고 다윗의 상황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군의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벌하시지만 완전히 낙담하여 케오 되도록 하는 데 있지 않고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통해 음식을 공급하시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왕적 영광을 회복할 것을 가르쳐 주십시다.
그러나 당신은 은혜가운데서도 심판과 당신의 자녀를 고난 통해 연단시킵니다. 여기 다른 사울가문의 종 한명, 시미므아가 나타나 다윗을 저주합니다. 짧은 본문에 저주라는 말이 8번 쓰였습니다. 시므아 또한 상당히 상징적인 인물같습니다. “시므아”는 “듣는다”는 뜻으로 여기서 사무엘의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사므아 + 엘 (하나님)). 선지자요 사사였던 사무엘이 한 역할을 하는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실제 시므아가 한 말은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 쓰는 그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만문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노라” 바로 그 히브리 단어를 그대로 써서 “시므이가 이렇게 말하노라.” (7절) 여기 시므이는 여호와의 입을 대신합니다. 물론 여호와의 온전한 종인 선지자들과는 달리 시므이는 악한 마음이 있었기가, 마치 가지가 여호와가 된 듯이, “시므이가 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하신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요. 한 표현이 2중적인 뉘앙스를 다 담고 있는 것이지요. 시므이의 저주의 행동은 여호와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 자신도 악한 자이므로 아마 심판을 당할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쫒아내는 큰 일을 하였으나 마지막 날 심판을 당하는 그런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마 7장).
시므이의 저주에 말에 다윗 주위의 호위병과 1등 전사들과 군사들은 시므이를 그냥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다. 그냥 두어라.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저주하신다. 앞으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좋은 일을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그냥 두어라.” (10-13) 이점이 다윗의 훌륭함입니다. 우리처럼 엉큼한 생각으로 남의 아내 탈취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였지만 여호와의 심판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여호와나 그 심판의 도구인 사람드에게 분노하지 않고 – 물론 얼마나 화 났겠습니까? – 그 주권적 하나님이 복주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소망가운데 저주의 말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가 밧세바에게 행한 그 일로 인해 이렇게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다. 당신은 정의로우십니다. 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당신이 복 주실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다윗은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역사의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적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적이 가진 악함과, 그 악한 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 하나님의 심판의 시행, 그러나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별하였습니다.
암울한 시기에서 때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때로는 여전히 징벌을 받지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 행하심대로 알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예언자적 안목과 동시에 겸손한 종의 자세가 다윗에게는 있었습니다.
실은 이 이야기는 다윗을 읽어라고, 다윗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다윗 왕조의 멸망 후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 예수님 오실 시대까지 산 구약성도들은 다윗의 이야기는 정말 자신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우상숭배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사회적 폭력과 간음으로 이웃에게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초라한 다윗왕 부대의 도망이야기는 실은 바벨론으로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그 포로기 백성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남의 땅에서 성전없이 지내야 했던 그 백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음식을 공급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바벨론에서 굶어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더, 에스겔 등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동시에 그들은 계속되는 징계를 경험하였습니다. 바벨론 그 강가에서, 그들을 포로로 잡아온 바벨론 사람들은, 그 포로지에서 시온의 노래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초상난 집에 찾아온 독재가가 잔치노래를 하도록 명령한 격입니다.
군대에서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엄청나게 힘든 훈련하고 벌을 세운 다음에, 군대 조교는 훈련병들에게 “나실제 괴롬 다잊으시고”를 노래하라고 합니다. 전혀 노래할 상황이 아닌데 할 수 없이 노래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울음바다를 만듭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기쁘지 않은데도 노래해야만 했습니다. 시온을 떠나서 시온의 노래를 눈물범벅이 되어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야 했었습니다. 다윗처럼 저주를 받았고, 아마 다윗처럼, 이제 여호와는 이라엘을 주위 열강들의 먹이로 버려둔다고 조롱받았을지 모릅니다. 다윗의 반응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를 가르쳐 주는 모범교안입니다. 그들을 저주하는 대신, 심판의 도구인 그들을 저주하는 대신 달게 벌을 받으면서 여호와의 회복의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1세기의 이스라엘도, 로마의 식민지 가운데서 여호와의 구원의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도 일본군대와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별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었기에 그들은 그 심판을 달게 받아야 했습니다. 로마에게 욕하고 저주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독립군 지도자를 기다린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로마와 싸우는 대신, 그 분은 자기 백성들에게 적군취급을 당했습니다. 저주의 십자가, 자기 백성이 그 왕을 죽이려고 로마의 저주의 형틀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로마와 유대의 저주,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저주,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저주, 배운자와 무식한 자의 저주를 다 짊어 지셨습니다. 변명하기를 거절하고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그냥 십자가에서 모든 죄와 저주와 형벌을 집어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좋은 날을 바라 보았습니다.
고통은 3일은 지나고 마침내 부활의 날은 왔습니다. 승천하신 후 이제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 (마 7장: 눅 18장), 성령을 주셨습니다. 에스겔에게 약속하고 (36장),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한 성령 (31장), 그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 천국의 완성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세례와 충만을 받은 우리들,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죄와 싸우는 것을 압니다. 개인들의 죄, 노무현 대통령 팀의 교만과 무모함, 그리고 교신교단 정치목사들의 죄, 매일 영혼을 오염시키며 돈벌이 하는 저 음란물 제작자들과 박진영의 죄.
그러가 가장 핵심은 교회와 성도들의 죄입니다. 사익을 위해 교단을 팔아먹으려는 목사들은 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보다 더 나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모르고 만군의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처럼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다윗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악한자를 저주하는 대신에 수치와 분노를 삼키면서, 여호와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실, 그 좋은 날, 참된 영적 개혁과 부흥의 날을 바라봅니다. 저 돈독이 오른 그 목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쩌면 교신 교회와 한국교회를 심판하시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돈키호테 같은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교회를 심판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 비판의 말, 저주에 가까운 말은 하지 않고 참아내는 용기, 역사의 어둠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시바를 통해 먹을 것과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확인해 주시는 시바옷,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때로는 우리에게 사람의 그늘이 드리운 눈물 골짜기를 지내게 하시지만 좋을 날을 주실 것입니다.  어린애 소꿉장난하다 싸우는 것 같이 돈 몇억 때문에 목사의 명예를 파는 (양심을 파는 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가 통곡하지만 그러나 당신의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다윗의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왕권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탐욕과는 관계없는 성령의 일하심이 오늘도 당신의 교회에서는 강하게 일어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은 숨은 가운데서 바알 돈우상에 무릅꿇지 않은 목사와 성도들 최소한 7천명을 우리 교단에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선한 종들이 축제를 벌일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사는 날 동안 그 좋은 날 보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들 하나와 진, 경진이와 하진, 경훈이와 성훈이, 송영이와 예영이, 다희와 예희, 하늬와 하민이, 그리고 성은이의 날들에는 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그날은 당신께서 임하게 하십니다.
유대수 장로와 이기순 집사의 고난의 눈물을 씻기신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수치를 씻기 시고, 그 생명강가에서 영원히 끝없는 잔지를 벌릴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수모와 비교할 수 없는 너무 고급스런 맨션에서, 영원히 축복의 말을 들으며 살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