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눈물: 삼상 15장 기본 카테고리

왕의 눈물2003년 9월 9일

삼하 15장

사무엘서를 묵상하면서 점점 더 더는 확신은 구약성경도 신약의 복음서나 서신서와 같은 하님의 은혜의 복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삼하 15장을 묵상하였습니다. 아주 슬픈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울며 갔다는 구절이 두번이나 나오고, 백성들 모두 함께 울며 갔다고 합니다. 삼하 7장에서 다윗왕조가 영원히 계속 될 것이라는 언약적 축복을 받았는데, 이처럼 처참한 장면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간통하고 그 남편을 전쟁에서 살해하며, 간음죄, 살인죄를 한꺼번에 지었습니다 (11장).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왕의 눈물, 왕자의 눈물의 시리즈입니다. 이복자녀들끼리 일어나는 간음과 살인. 암몬은 이복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하고 그녀를 아내로 취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심한 인격적 모독을 줍니다. 다말의 친오빠인 왕자 압살롬은 먼저 암논을 살해합니다. 이 일로 다윗왕이 압살롬을 버린자식 취급하자, 압살롬은 다윗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다윗은 아들을 피해 비참하게 도망합니다.
압살롬은 그가 형제를 죽이고 이제 아버지를 죽이는 증오의 복수극을 펼칩니다. 그는 다윗왕이 피난 가고 난 후에는 다윗왕의 후궁을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간음합니다. 다윗이 우리야에게 범한 살인과 간음죄를 이제 압살롬은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들에게 당합니다. 우리야는 다른 사람에 의해 당했지만 다윗은 바로 자기 아들에 의해 자기 아들이 살해되고, 자기 딸과 후궁들이 성폭행당하는 일을 보게 됩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지만, 압살롬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자기 이름에 정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아브 (아빠) + 샬롬. 즉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고 평화를 사모한다는 이름을 평생가져온 그가 자기 여동생의 성폭행 문제로 이제 복수의 살인극과 성폭행을 자행합니다. 예루 살렘에서 (도시 + 샬롬) 평화의 도시에서. 그는 평화를 위한 제사 (샬롬제사 화목제 15:7)를 드리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꿍꿍이 속도 모르고 “평화”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15:9). 평화의 인사말을 듣고 평화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러 간다고 한 그 “평화의 아들”은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전쟁와 증오와 고통의 도시로 만듭니다.  의도적으로 평화를 반복하면서 성령님은, 이게 너희의 평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우리모두의 현실에 대한 폭로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주님의 은혜로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편지문구를 좋아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평화에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도 자기 아버지의 후처와 간음하는 일 때문에 바울은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그 근친상간을 한 사람에 문제지만 그런 사람을 권징하지 않고 용납하는 고린도 교회를 더 질책합니다. 한 누룩이 온 교회에 번져서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 일은 일반 세상에도 없는데 어찌 그런 일을 교회에서 용납하는가? (고전 5장).
실은 몇 년전 기윤실 일하면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교회적으로, 감리교단 뿐 아니라, 장로교에서도 권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여성도와 간음하고 법정에서 위증을 하였는데, 재주가 좋아서 여성도와 민법상 합의를 했기 때문에 법원에서는 형법상 위증죄로만 처벌을 받았습니다. 법원의 위증죄 처벌은 그가 간음한 것을 사실로 판단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목사노릇 하다가 얼마 전에는 공금횡령죄로 구속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은 다른 사람같았으면 벌써 구속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정부도 항상 교회는 교인들 표를 의식해서 왠만하면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진작 교회에서 비판하고, 권징을 해야 했었는데, 교회의 도덕수준은 검찰만도 못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윤실 일하며 알게된 초대형 교회의 목사도 실은 구속감인데 검찰에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습니다. 다시 수사하여 구속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을 말하면서 자기 이익 위해 하나님 얼굴에 똥칠하고, 교회의 평화를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평화의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냥 사극에나 나올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깊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호령입니다. 오늘 성경을 읽는 저나 우리들이 자신의 감추인 죄를 돌아보도록 촉구하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소위 찬란한 다윗왕조가 얼마나 초라한가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고상해 보여도 속에는 온간 음란과 살인의 마음이 움직이고 실제 살인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십명의 아내외 첩을 거느리고 번성하는 다윗왕조도 하나님의 심판과 그 아들의 야망 앞에 너무나 초라해 집니다. 머리에 먼지를 쓰고 애기처럼 울면서 피난을 갑니다. 16장의 36절 중에 22번이나 “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왕권이라는 것이 힘있어 보여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부패의 권력 암투극 속에 있고 그래서 얼마나 초라할 수 있는지. 성령님께서는 “그래 이것이 인간이 만든 정치권력이다 똑똑히 봐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기에 이 성경을 읽은 앞서간 구약성도들은 “맞다. 이것이 우리의 왕조였다. 그 황금시대 다윗때부터 이렇게 초라했는데, 500년 정도 왕조가 계속된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처참함을 겪은 성도들은, 그 다윗에게 허락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을 것입니다. 다시 수백년이 지난 후, 로마의 식민지 권력과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종교적 억압에 시달리던 갈릴리의 어부들도 참 왕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 권력도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포장을 해도 다윗왕조 보다 하등 나을 것 없을 것입니다.  목사들 중에 가장 꼴불견은 청와대 조찬기도회 한번 사회하고 왔다고, 뭐 청와대 종교담담비서관하고 친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권력의 죄성을 알고 대통령이나 정치기를 당당히 꾸짖어야 하는 본연의 책무는 망각하고 유치하게 정치권력에 빌붙으려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욕입니다.
다윗의 아들 거짓 “평화의 아비” 압살롬의 반란사건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 그리고 인간의 집단의 죄와 비참함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나 우리 모두 감추인 죄, 얄팍한 자존심, 인정받고 싶은 욕구, 탐욕 등, 선지자와 예수님은 분명히 폭로합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이 비참한 다윗의 피난에서 희망의 빛은 그의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아마 고통과 비통의 눈물이기도 했겠지요. 아들에게 죽게 되었으니. 그러나 그보다는 회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간통한 후에 우리야를 만나서 세번이나 전쟁터가 “평화 (샬롬) 11:7)”하냐고 물었던 다윗은 자신의 위선적 평화를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살인과 자신의 거짓. 그의 흐르는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선지자적 식견을 가진 다윗인지라, 아들의 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 나아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깊은 절망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눈물은 죄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겟세마네의 예수님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회개할 죄가 없는데도 벌을 벗으며, 우리의 회개를 대신 회개해 주신 온 우주의 왕,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신 회개한 스데반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속에 우리는 교회간다고 지개 작대기로 얻어맞고 손 아래 사촌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당한 유대수 장로의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도 웁니다. 아직도 부족한 우리들. 작은 이익에 눈멀어 사랑하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웁니다. 그리고 치사하게 개인 돈을 벌려고 고신교단과 교회를 팔아먹으려는 정치목사들의 우둔함 때문에 웁니다. 돈독에 눈이 올라 명예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도 모르고 반쯤 실성한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며, 순교는 커녕 교회돈을 도둑질하려는 사람들은 순교자의 후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던 위선적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처럼 그런 판단은 할 영적 능력과 자격은 없지만, 다만 두렵습니다. 양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지옥에 간다고 경고하셨으니 두렵습니다. (마 7장). 다윗도 예외도 아니었고, 우리 모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응분의 축복과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만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고, 그들에게 설교 들으며 사례를 바쳐 돈놀이하는데 돈 보태주는 성도들이 불쌍합니다.
다윗의 눈물은 오직 예수님 당신의 구속의 고통에서 씻겨졌고, 유대수 장로의 눈물은 서도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보좌에 앉은 어린양께서 처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그로 인한 비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시고 우리를 성도라 하십니다. 눈물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사람들에고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왕으로서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 지도록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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