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경해석방법 기본 카테고리


<서평> 칼빈의 성경해석 관찰하기와 배우기
리차드 갬블 편 (Richard C. Gamble Ed), 칼빈과 칼빈주의에  관한 논문집: 칼빈과 해석학 (Article on Calvin and Calvinism: Calvin and Hermeneutics) (London: Garland Publishing Co., 1992).

유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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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계획은 칼빈의 바울서신 주석에 관한 연구서를 서평하기로 하였으나 적절한 챇이 없어 성경 해석학 일반에 관한 리차드 캠블 교수의 책을 선택하였다. 10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 최근 연구성과를 관찰할 수는 없지만, 1909-1987년에 걸쳐 발표된 논문들을 통해 칼빈의 성경해석학에 관한 우리 시대의 연구경향을 관찰하기에는 적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서평은 주로 논문들의 주요논지들을 요약하고, 약간의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칼빈의 성경해석학에 대한 논문들의 내용은 대개 Kraus (1977)의 논문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Kraus는 칼빈의 성경해석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성경과 성경해석자, 즉 성경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 후, 칼빈의 성경해석의 8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1) 간단 명료성 2) 저자의 의도  3) 상황 (시간, 장소, 등) 4) 영적 풍유적 (allegorical) 해석보다는 자구적의미의 중시  5) 문맥의 중시  6) 때로는 성경의 자구적 의미를 넘는 해석  7) 비유는 비유로 해석  8) 그리스도 중심성 (scope). 이제 좀 더 자세히 칼빈의 성경해석학에 대한 논문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I. 성경과 성령, 그리고 기록자와 독자 (해석자), 해석의 공동체
칼빈은 성경이 기록될 때와 해석될 때 성경문서와 성령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로 성경기록자는 성경을 기록하지만 성령께서 기록자를 감동함으로써 문서의 기록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을 칼빈은 하나님의 "맞추어 주심 (accommodation)" (Battles, 26)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 이해의 한계 혹은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원시성에 하나님 자신의 표현을 맞추시는 것이었다 (Wright, 217). 성령이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칼빈은 성경말씀을 "불러주셨다 (dictate)"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저자가 자신의 인식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한 것을 알기 때문에, "모세는"혹은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는 표현을 쓴다.
성령은 성경의 기록을 위해 저자를 감동하신 후, 이제 후세의 독자들이 성경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증거"를 주신다 (de Moore, 327). 성경의 이해에서 성령의 증거가 필수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칼빈은 말하기를, 마치 당나귀가 콘서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둔하므로 성령께서 인간 마음의 장애물을 치우시고, 마음과 눈, 귀를 열어 주어야 성경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Floor, 168).
성령의 감동에 대한 칼빈의 확신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이해할 뿐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이해할 때 "진리의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 "신앙적 지향성과 실존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게 한다 (Polman, 299). 성령의 은혜를 말씀을 통해 받는다는 칼빈의 인식은 16세기 상황에서 분명한 독특성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로마교회의 성례주의에 저항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재세례파의 방종주의의 신비적 개인주의를 바로잡으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증거를 동시에 강조하였던 것이다 (Polman, 303, 305).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겸손함은 성령의 증거와 도우심으로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자세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령의 증거에 의존한다고 해서, 그럼 사람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칼빈은 바른 성경이해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성령께서 조명하시며, 따라서 그 자신은 은 성경의영감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지만, 그 자신은 "지속적인 성경공부와 준비"를 하면서 동료 종교개혁자들과 유대속에서 성경강해를 하였다 (Fuhrmann, 109-113).
칼빈이 함께 한 해석의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였다 (Floor, 172). 그는 중세적 영적 풍유적 해석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교부들의 저작에서 많이 배웠고 특히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리 (Doctrina Christiana) 와 상당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성경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문자적 의미-비유적 의미를 구분하는 섬세성 등은 강한 어거스틴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Ayer, 414-5).
한편 칼빈의 욥기해석에서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논쟁이라고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계승하는 점에서 칼빈은 중세와 연속성을 보인다 (Schreiner, 235). 또한 칼빈은 중세적 잔재라는 이유로 풍유적 해석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 아니라 수용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서 Ayer는 중세적 풍유적 해석의 수용이라고 말하지만 (Ayer, 413), 그러나 이 평가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이어가 예시한 칼빈의 중세적 풍유해석 수용은 단지 성경에서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중에 보겠지만 칼빈이 수용한 것은 중세적 풍유적 해석이라기 보다 성경적 유형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관점이라고 본다.
동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의 공동체와 관련하여, 칼빈은 로마서 주석 (1540 발간)을 서문에서 루터를 비롯한 다른 개혁가들이 이미 출간한 로마서 주석은 언급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이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칼빈은 멜랑히톤의 로마서 주석은 너무 간소하고, 부서의 주석은 너무 장황하므로, 자신은 일선 목회에 바쁜 목사들이 쉽게 참고할 수있는 간단명료한 주석을 쓰겠다고 말한다.

II. 본문에 대한 이해
이미 말했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쓰여진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원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마침 르네상스 분위기에서 히브리어, 헬라어의 연구가 활발한 상황에서 그 자신이 부지런히 성경언어를 배워 성경을 원어로 연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경시대의 지리, 역사 등에 대한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Woudstra, 154-160).
성경의 원어실력에 기초하여 칼빈은 성경의 자구적 의미, 보다 정확히 말해 성경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자구적 의미에 대한 중시는 모든 성경표현을 쓰여진 대로 해석하는 우둔함이 아니라 성경수사법을 바로 파악하여 본문의 진의를 잡아내는 섬세함이었다. 비유는 비유로 해석하여 성경저자가 의도한 내용을 파악하였다. 다만 중세적 풍유적 해석과는 달리, 칼빈의 비유해석은 "신비적이라기 보다는 교육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Douglass, 102)
칼빈은 성경이 수사적 표현을 상당히 담고 있는 것을 유의하였다. 다만 그가 본 것은 일반의 세속적 수사학은 "천박한 수사학"이지만 성경의 수사학은 "단순한 메시지"에 있다는 것이다 (Gamble, 48). 그러면서도 칼빈은 일반 세속의 수사학을 마냥 부정한 것이 아니라 불링거와 함께 그 세속적 수사학을 성경을 해석하는데 적용하는 개방성을 보여준다 (Busser, 445).
자구적 의미 이면의 의미에 관해 칼빈은 중세적 풍유적 해석과는 다른 유형론적 해석 (typology)를 사용하였다. 유형론적 해석은 문자적 의미를 부인한 풍유적 해석과는 달리, 우선은 역사적 문자적 의미를 타당하게 받아들이고, 그 구절이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유형 (혹은 예표)이 되는지를 밝힌다. 풍유적 해석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이루어 졌지만 칼빈의 유형론적 해석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적용되었다 (Bates, 159).

III. 신학적 이해
칼빈이 성경언어와 수사법에 주의를 기울이며 주석을 하였지만, 성경연구의 핵심은교리적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Prust, 392). 성경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는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구약 예언자들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예언, 시편 등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발견하였다 (McCane). 그러나 그는 구약의 기록들 자체가 구약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 말이 의미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점에서 중세적 풍유적 해석전통과는 입장을 달리한다. 왕과 관련한 시편 (royal psalms)에서 나오는 다윗은, 1차적으로는 다윗과 그의 백성으로, 2차적으로 그리스도로 해석하였고 전체적으로 다윗의 왕국은 그리스도의왕국으로 해석하였다 (Russel).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이해는 성경주석과 조직신학의 긴밀한 관련속에 신학적 사색을 전개한 칼빈의 신학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빈의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의 서문은 기독교강요가 성경에서 나온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 말하였으며, "강요"라는 표현은 중세 이해법률용어로서 요약이라는 뜻임을 상기한다면, 칼빈은 자신의 조직신학을 성경의 요약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성경신학은 단편적인 석의에 끝나지 않고 기독교강요에 요약된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성경 "신학"으로 전개되었다.  칼빈의  성경 주석은 종종 기독교강요를 참조하라고 말하는 것(Mikelsen, 368)은 성경의 개별구절을 주석할때 칼빈은 조직신학적 큰 틀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칼빈의 성경중심성 때문에 파커는 칼빈이 "조직신학자라기 보다는 성경신학자"라고 표현하지만 (Parker, 65) 이는 자칫 칼빈이 조직신학을 경시한 듯한 오해를 주어서는 안되겠다. 성경신학, 조직신학의 학문적분리가 계몽주의의 영향 이후에 생긴 이분법이며, 칼빈에게서는 조직신학의 "교리"는 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차라리 성경의 가르침의 통전적 이해의 맥락에서 개별 본문을 이해하였다고 보는 편이나을 것 같다.

V. 평가
칼빈의 성경해석학에 대한 이 논문집은 칼빈의 성경해석학의 다양한 측면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이 논문집은 하나님의 주도권과 성령의 조명하에서만 사람이 성경의 의미를 잘이해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성경원어와 수사법을 관찰하며 부지런히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칼빈의 성경해석학을 균형있게 제시한다. 칼빈이 혼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천재적 종교개혁가라기 보다는 고대 교부들에게서 배우고, 중세의 풍유적 해석법을 부인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해석법을 공유하며, 특히 개혁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배운것을 담은 것은 이 책의 훌륭한 점이라 하겠다. 또한 어떤 논문은 칼빈의 신학을 성경신학-조직신학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문제점도 있지만, 성경이해가 신학의 핵심을 지적한 점은 옳다.
앞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점 외에 본서가 제시하는 칼빈이해에 대해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서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연구과제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칼빈의 신약주석에 대해 다룬 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이다. 학계의 연구가 편향된 것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칼빈의 신약 주석에 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음으로 칼빈의 성경주석을 좀더 역사적으로 정확히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본다. 교부, 중세, 그리고 16세기의 일반적 성경해석과 성경이해가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이해 위에서 칼빈이 이전시대와 동시대의 주석가들과 공유하는 것은 무엇이며 다른 것은 무엇이며, 새롭게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맺음말
칼빈은 오늘날의 신학과 교회를 형성한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배워야할 선생이기도 하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 성경을 일반문서와 같은 문서로 취급하고, 성경 외적인 성경자료의 전승과정과 성경이쓰여지던 사회문화적 배경에 편집병처럼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 학계에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칼빈의 "낯설고, 이상하고, 코믹하고, 광신자 같은" (Steinmetz, 188) 해석학은 새롭게 부활되어야 할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바보스러운 것이 복음이며, 또 교회는 시대를 초월하여 한 하나님, 한 세례 안에서 한 고백을 나누는 공동체일진대, 특히 성경을 교회의 중심으로 회복한 개혁자일진대, 우리는 현대적 성경신학계의 현란함에 주눅이 들지 말고 칼빈과 함께 겸손한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경해석학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8-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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