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고백과 용서, 고난에서의 구원과 기쁨 (시 32편) 기본 카테고리

시편 32편: 죄의 고백, 용서, 고난에서의 구원과 기쁨
(2003년 10월 24일)

한국교회도 그런 경향이 좀 있지만 미국교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죄의 회개에 대한 설교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개와 그에 따르는 참된 치유를 갈구하기 보다, 그냥 문제없이 재미있게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미국사람들의 경향이고, 그래서 아마 교회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회개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하는 용기가 없는 듯하다.
오늘 시편에서는 죄의 고백과 용서  고난에서 구원  기쁨 등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요즘 사람들과는 달리 시편에 등장하는 이 의인, 복있는 사람은 죄를 지었고 또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지 않고 덮어두려 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둔감해 져 버린 요즘 사람들과 요즘 교회와는 달리 그의 양심은 여전히 민감한 상태였다.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 자기 뼈가 짓누르는 것 처럼 고통스럽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간증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나의 죄와 무관한 고통의 문제였다. 악한 자들이 의인을 핍박했던 것이다. 그 고난가운데 우리 시편의 등장인물인 의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그리고 새롭게 구원해 줄 것을 확신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다. 우리는 힘든 일이 생길 때 우선 해결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은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의 문제 해결은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해야 할 일이다.
기도한 후 시편의 등장인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그들의 주위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둘러 있을 것을 확신한다. 때문에 그는 모든 의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고 권유하며 시를 끝맺는다.
이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회개를 통해 의로운 사람으로 되고 기쁨을 회복하는 지를 보여 준다. 요즘은 회개해야 한다, 매일 죽는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등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를 둘로 정의하자면 죄와 고통의 문제가 할 수 있겠는데, 그 중에서 죄의 문제가 더 근원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시편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회개한 후에, 그는 “이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 “이 때문에” (조트)는 시편에서 “악행”에 대한 관용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7:4). 즉, 회개한 성도가 여전히 당하고 있는 고생과 핍박이다. 전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주위 사람이 자기에 대해 행하는 불의한 행동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판의 도구일 수가 있기 때문에 잠잠히 고난을 감수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선명해 지면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 이후, 타인이 자신에게 가하는 악행에 대해 자신있게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있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 혹은 소망하는 자에게 베푸신 “선하심과 인자하심” 혹은 좋으심과 사랑하심을 경험하였다.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개인적 만족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선교로 이어진다. 그는 모든 의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가를 가르치고 (9-10)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도록 권면한다. 죄와 고통, 그리고 구원은 항상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의 맥락에서 이루어 지기에 한 사람의 축복경험은 항상 전 교회의 영적 복지를 추구하는 공동체적 차원을 가진다.
로마서 8장도 시편처럼 흘러간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8:1-3).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령충만의 복을 누린 성도가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현재의 고난”이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 고난은 “스테나조” (좁아짐이라는 어원에서 통곡이라는 뜻을 가짐) (21, 22, 26)로 표현된다. 로마서는 전 우주의 통곡에서 시작하여, 성도들이 가지는 통곡을 말함으로써 시편보다는 훨씬 더 고난의 우주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고난의 우주성이 더 선명해 진 것이다. 로마서의 더 큰 위로는 성령께서 이 고난의 통곡에 동참하여 부르짖는 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의 눈물은 성령 안에서, 성령충만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 대신 중보적 통곡을 행하신다.
성령의 중보적 통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고통을 치유하시면서 하셨던 고난의 통곡 (막 7:34, 스테나조, 우리 말은 한숨이라 번역되어 있는데, 고난의 통곡을 위미함)을 성령께서 계속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그러나 당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중보사역을 계속하신다. 오늘 시편 속의 의인이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은 실은 당시 구약 교회의 부르짖음이었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짖은 것이었다. 과거 시편의 성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경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고, 오늘날 우리들이 죄와 고통과 씨름할 때, 우리도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짖는다.
이 부르짖에서 환희의 노래로 이러지는 흐름은 실은 계시록에서 더 선명히 보여준다. “할렐루야, 이제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화하도다.”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로다.” 거기서 유대수 장로와 이기순 집사는 이 땅의 한을 씻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 모두도 죄와 고통과의 투쟁 속에 어느 정도는 이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지만, 그날 이후에는 모든 성도와 온 우주와 함께, “황금비파 곡조 맞춰 기쁜 노래 부를 때 세상 고생 꿈에 본 듯 있으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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