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주실 때도 함께 계시며 사랑해 주시는 임마누엘 (겔 35) 기본 카테고리

오래간만에 믿음의 가족 기윤실 간사님들과 믿음의 가족이자 혈육인 저의 형제들과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음 달 말이면 논문을 끝내야 하는데 아직 제안서를 쓰는 중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답답하게 늑장을 부리는 것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처럼 그렇게 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기도해 주시고 저도 성실하게 소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에스겔서는 3년 전 간사님들 월요일 아침 모임 때, 에스겔서의 전체 메시지에 대해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스겔은 597년에 BC에 1만명의 엘리트 유대인들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것 같습니다.  그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다왕국의 멸망은 단지 500년간 계속된 왕조의 몰락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왕국을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문제였고, 그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백성들의 몰지각성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더구나 그 왕국의 핵심은 예배에 있었고 에스겔 자신은 제사장이었으니, 에스겔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성전과 성지를 떠나서 이국 땅에 끌려와 있는 제사장, 그 제사장의 가슴 깊숙히 떠나지 않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가? 성전이 없는 이 곳에서 도대체 제사장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도대체 성전이 없는 곳에서 제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그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에스겔 1-3장에 나타난 “하늘의 성전”이었습니다. 마치 하늘 만큼이나 큰 스크린에 하늘의 성전이 나타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하나님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룹과 바퀴들, 그 사이에 있는 하나님, 특히, 사람으로 성육신 하실 인자 같은 분께서 거기 계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화와 같은 “그림의 떡”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의 임재하심, 진짜 떡이었습니다.
그 임재는 신비경험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경험이 아니라 위에서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신비는 자아를 상실한 무아지경, 열반의 경험이 아니라 에스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구체적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가르치는 실제적 경험이었습니다. 더구나 구체적 예언의 메시지가 있었고 그 후 수 십년 간 에스겔은 그 신비경험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인류역사에 대해,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나아가 역사의 완성, 바로 요한 사도가 밧모섬에서 경험하고 증언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메시지와 함께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의 시각체험적 경험은 그 자체가 메시지였을 것 같습니다. 에스겔아, 비록 너는 지상의 성전을 떠나 와 있지만, 참 성전을 떠난 것은 아니다. 참 성전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6백 년 후에 요한에게 보여주겠지만 인류역사의 끝에는 이 하늘의 성전이 땅으로 내려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도 나의 모든 백성은 항상 나의 성전에 살고 있다. 육체의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지만 하늘의 성전 안에 살고 있다. 실은 땅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의 그림자이다. 네가 보기에는 성전이 없는 제사장이지만 너는 영적 제사장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주 임무이니까  (신 18장) 너는 참 제사장으로서 예언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쳐서 그들이 신앙과 삶에서 참 제사장이 되도록 해라. 나의 모든 백성은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마틴 루터나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내가 가르쳤고 온 시대에 참 나의 백성이 알아온 자기정체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아마 이런 비슷한 메시지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흐름 가운데서 오늘은 34장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에스겔서 48장은 전체적으로 절반을 뚝 잘라 앞쪽 24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뒤 쪽 24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뒤 쪽 절반 중에서 24-39장은 열방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교차되고 있습니다. 그 중 거의 후반부에서 이제35장은  “에돔”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에돔은 “아담”과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모든 인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적절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에돔은 야곱 (이스라엘)의 형 에서의 족속이니까, 로마서 11장에도 보면 선택 받은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 오늘날의 교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아갈 때 우리가 실패하고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는 그런 모든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의 모든 것을 접수해 버리자고 하면서, 우리의 삶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끼어 맞추려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그 땅을 우리가 차지하자.” (10절).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이 엄청난 포로기의 수치를 당하게 하셨지만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내가 그들 (이스라엘) 가운데서 나를 알리리라 (11)” 그리고 에돔이 이스라엘을 차지하자고 치욕적인 마음을 품고 모욕한 것을 하나님은 “나에게 함부로 말한 것” (12절)이라고 합니다. 3번이나 반복된 것의 첫번은 “여호와가 그들 (심판당한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 (10절).
악한 자들은 모든 일이 잘 되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실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선택된 백성은 비록 일이잘 안되더라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크게 보면 단순히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고통과 죄로 인한 고통의 문제입니다. 심지어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아들이 말 잘 듣지 않는다고 뒷마당에 벌을 서게 하고 있는데 옆집 아이가 와서 우리 아들을 놀린다고 합시다. 얼마나 “열”받겠습니까? 아들을 사랑 하니까, 더 잘되라고 벌 세우는 데, 그리고 벌을 세우면서도 그 아이 힘든 것이 못내 마음 아픈데, 아무 상관도 없는 애가 와서 까불고 있으니. 아들에게 벌을 줄 때 가진 감정의 몇 배나 더 화가 나서 옆집 아이를 쫓아 버릴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있다.” “여호와 샴  (거기에)  호와 (있다)” 그냥 듣기에도 무선 구호 같습니다. 여호와 샴 하야! 이 말은 원래 에스겔서 마지막 절에 나올 말인데, 하나님이 급히 말하십니다. 마지막 말은 “여호와 샴 (아)” (48:35)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여호와  거기에” “여호와 여기에”입니다.
새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새예루살람에 영원히 구체적으로 새겨질 여호와의 이름은 모든 시대, 모든 순간에 당신의 백성가운데 영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더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풍성한 계시는 성경으로 기록되고 말씀의 전파와 교회의 전통과 함께 성령께서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도록 하는 영적인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성육하신 예수님은 3년간 육체적으로 우리 가운데 “성전이 되었지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에서 “거한다”는 것은 지구적으로  성막을 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샴마의 다른 말은 임마누엘 입니다. “임 (함께), 마누 (우리), 엘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로서, 그리고 지금은 성령의 함께 하심과 충만케하심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의 위로는 우리가 잘못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벌을 서고 있을 그 순간에 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않는 듯하고 그리고 원망스럽고 미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 순간에도 임마누엘, 여호와 샴마. 가장 초라해서 남들도 나를 비웃고, 그들의 비웃음에 내 자신이 공감이 되어 말대꾸도 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여호와 샴, 여호와 여기에, 임마누엘.
그러나 회복은 먼저 계시의 말씀과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회복이 옵니다. 심지어 회복의 메시지 조차도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1-24장) 다음 (35장)에 옵니다. 심지어 회복의 메시지 직후에도 또 왜 우리가 벌받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고 (36장) 그 다음에 다시 회복의 메시지 (37장-48장)가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 회복의 역사는 이 예언이 있은 지 수 십 년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포로귀환. 그것도 불충분한 회복이어서 지상의 성전은 제대로 복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참 회복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영적 성전을 사도들을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하고 있는 지금에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완성의 날은 앞에 남아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회복에 대한 말씀과 그에 대한 우리의 신앙,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대로 구체적으로 매 순간 더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 그사이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말씀의 약속과 믿음, 그러나 우리의 연약과 하나님의 계속되는 벌, 이 사이에 살아가니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안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의 오심과 교회의 확장은 우리 개인적인 갈등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우리 양심에 하나님께서 심어준 확신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병, 갈등, 죄와 싸움, 이 힘은 발걸음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길을 조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분명한 치유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일하심에 있습니다. 여호와 샴마, 임마누엘.


Leave Comments